단언컨대 저는 ‘행운아’입니다. 그것도 '대단한 행운아'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웃 복(福)’이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산 지 수십 년인데, 아직 층간소음으로 걱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딸 둘은 조용히 컸고, 위아래층에서도 이렇다 할 ‘소음’을 들었던 기억이 없었습니다. 이사도 적지 않게 했지만 위아래층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제가 얼마나 큰 행운을 누렸는지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살인 사건을 포함해 층간소음으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가 하루가 멀다 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건수가 계속 늘고 있습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제기된 민원 건수도 지난해 4만 2250건에 달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2만 6257건)보다 배 가깝게 늘었습니다. 지난 5년간 연평균 증가율은 20% 이상에 달합니다.
그것도 공식 제기된 건수만 이렇습니다. 속을 썩으면서 꾹꾹 참고 있는 폭발 직전 사례, 그래서 아직 공식적으로 취합되지 않은 사례까지 합하면 그 수가 얼마일지 짐작하기 힘듭니다. 아마 2~3배?
왜 이렇게 층간소음 분쟁이 끊이질 않을까요. 코로나 집콕으로 서로 날카로워지면서 분쟁이 더 잦아졌다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① 공동주택 거주자가 너무 많습니다.
좁은 한국 땅엔 2020년 기준으로 5183만 명(2148만 가구)이 삽니다. 이 중 절반 이상(가구수 기준으로 51.5%)이 아파트에 삽니다. 연립 주택이나 다세대 주택까지 합하면 10가구 중 7가구가 한 건물(공동주택) 아래 옹기종기 모여 사는 셈입니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잘날 없다고. 조용하기 어려운게 당연합니다. 공동주택에서는 맨 위층과 1층 거주자를 빼면 모든 가구가 누군가의 위층이면서 동시에 아래층이 됩니다. 모두가 ‘잠재적’ 층간소음 가해자가 되는 셈입니다. 저처럼 이런 공동주택에 살면서 수십 년 동안 수십만~수백만 건에 이르는 층간소음 분쟁(미취합 건수 포함)을 피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저는 그저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②집 구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집이라도 제대로 지으면 괜찮치 않을까요. 그런데 다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한국 아파트들은 소음이 잘 전달되는 방식으로 지어집니다. 전문 용어로 ‘벽식구조’라고 합니다. 벽을 세워 하중을 떠받치는 구조인데, 이렇게 되면 위층 소음이 벽을 타고 그대로 아래층으로 전달됩니다. 기둥을 세워 하중을 떠받치는 '라멘 구조' 건물은 소음을 기둥이 흡수합니다. 오피스텔이나 사무실에서 층간소음을 못 느끼는 이유입니다. 아파트가 벽식 구조로 지어지는 이유는 건설비가 싸고 빨리 지을 수 있는데다 내부 공간 활용도도 크기 때문입니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한국 주거 문화가 갖는 특징도 이유로 꼽습니다. 한국은 아파트도 온돌구조로 만들기 때문에 딱딱한 바닥이 그대로 노출되고, 여기를 맨발로 이용합니다. 온돌을 깔지 않는 서양식 아파트에서는 카페트를 깔고, 슬리퍼를 신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딱딱한 바닥을 맨발로 걷기 때문에 소음이 그대로 전달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여기다 건축 기술이 발달하면서 슬래브 두께가 점점 얇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 아파트보다 최근 아파트에서 층간소음이 더 심한 이유입니다.
③층간소음 기준도 너무 느슨합니다
벽식구조로 짓더라도 층간소음 기준을 엄격하게 정해 놓으면 문제가 해소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층간소음 전문가로 잘 알려진 차상곤 박사는 그의 저서 <당신은 아파트에 살면 안 된다>(황소북스, 2021년)에서 왜 일이 그렇게 됐는지 생생하게 전합니다. 2003년 층간소음이 전국적인 문제가 되자 공동주택 건축 시 적용할 층간소음 기준을 정하기 위해 학계와 업계 전문가와 해당 부처 담당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합니다. 차 박사도 '아파트 주거문화 개선 시민운동본부' 사무국장 직함으로 이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참석자들은 난상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어처구니 없게도 다수결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차 박사를 포함해 일부 참석자들이 48 데시벨은 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건설업체 관계자들의 요구대로 기준이 50 데시벨로 결정됐습니다. 차 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중량 충격음 기준을 제가 주장한 48 데시벨로 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50 데시벨 기준으로 시공하는 것보다 가격이 3배 이상 더 들었겠지만 저감 효과는 크게 좋아졌을 겁니다. 최근 4만 건을 넘어선 층간소음 분쟁 건수도 크게 줄일 수 있었겠지요.”
④정부와 정치권 수수 방관도 더 큰 문제
정부와 정치권도 문제입니다. 층간소음 분쟁이 사회 문제화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손 놓고 있다가 끔찍한 사건이 나면 그때서야 호들갑입니다. 진작에 건축 기준도 바꾸고, 관련 입법도 끝냈어야 합니다. 층간소음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국민 기본 교육도 필요합니다. 아파트 단지마다 분쟁이 생겼을때 자율적으로 조정할 시스템도 마련돼야 합니다. 문제는 많고 할 거는 태산입니다. 그걸 방기 하다가 일이 터지면 엉뚱한 곳에 손가락질만 하기 바쁩니다.
최근 인천에서 층간소음 문제로 다세대주택 3,4층 주민간에 칼부림 났고, 현장에서 경찰관들이 도망쳤다고 해서 시끄럽습니다. 경찰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책임자들을 일벌백계하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쏟아집니다. 물론 경찰이 잘못했습니다. 테이저건 아니라 실탄을 쏴도 시원찮은 판에 도망이라뇨. 치도곤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게 경찰들만 혼낼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층간소음이 나게 허술하게 건물을 지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건축 기준을 그렇게 허가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층간소음에 관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다들 뒤에 물러서서 팔짱만 끼고 여경과 경위에게만 손가락질입니다.
경찰청장이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고, 경찰 교육시간을 늘리고, 경찰 선발 기준을 엄격히 한다고 한들 층간소음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합니다. 층간소음 문제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면 아마 천년이 가도 풀리지 않을 겁니다. 건설사부터 정부, 정치권 거기에 시민들까지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관련 규정과 법 등이 바뀌기 전에라도,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위아래층 간에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용기 있게 먼저 사과하고 용서하면서 화해하는, 그런 성숙한 시민문화부터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너무 어려운 숙제인가요. 힘들더라도 시민들부터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층간소음 살인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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