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집 아저씨의 시계 가방과 '뒤늦은 사과'

사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인 이유

by 이리천

무의식 중에 턱턱 걸리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길가다 누굴 봤는데 갑자기 생각나기도 하고, 누구랑 얘기하다 어떤 단어 때문에 떠오르기도 하고, TV에서 특정 장면과 겹쳐 보이기도 하는 그런 기억들.


그런 기억에 가슴이 알싸해지면 목젖을 타고 뭔가 넘어오는 듯한 느낌 들 때가 있지 않나요. 잊고 살았는데 너무나 강렬해서 그 시절로 곧바로 소환당할 것 같은 그때 그 사람, 그때 그 장면, 그때 그 느낌.


지인이 전해준 스토리가 그런 류입니다. 지금 당장 30년 전 그곳으로 가고 싶게 만드는 그분의 얘기를 공유합니다. (지인의 요청으로 특정 대학명과 상호명을 사용하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대학 학보사에서 일했던 지인이 좋아하는 맥주집이 있었습니다. 교문 앞에 있어 학보사 선후배들과 늘 들러 맥주 한잔 하던 곳. 값싸고 양도 푸짐한 안주에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 곳 있잖아요. 아지트처럼 드나들 던.

그런데 이 집 사장님이 그렇게 친절했던 모양입니다. 돈이 없을 때는 맥주 한 잔에 노가리 하나 정도는 그냥 내주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찾아가면 “00 씨. 노가리 줄까”라며 항상 다정하게 맞아주는 동네 큰 형님 같은 분이었다고 하네요.

하루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2차인지, 3차인지 그 집에 갔다고 합니다. 후배들에게 술을 사야 는데 돈은 없고, 체면은 깎일 수 없어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아저씨. 저 죄송한데 시계 맡길 테니 오늘 외상 안 될까요”

사장님이 빙그레 웃더니 카운터 밑에서 큰 가방을 하나 꺼냈다고 합니다. 아무 말없이 가방을 열었더니 그 안에는 수백 개의 시계가 있었다고 하네요.

“응 그러자고. 그런데 00 씨처럼 금방 찾아간다고 하고 맡긴 시계가 이렇게 많아.”


주인아저씨 말에 따르면, 시계를 금방 찾아간 학생들도 있지만, 시계 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가방 속에서 초침이 멈춘 시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후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 정말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시계를 찾아간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고 하네요. 주인아저씨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아저씨. 온다고 온다고 하다가 너무 늦어버렸네요. 그동안 돈도 벌었고 오늘 시계도 찾았으니 몇 배로 더 마시고 갈게요”


그런 날은 너무 기분이 좋아 사장님도 절로 한잔하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더 많았지만요. 주인 아저씨는 남은 시계들이 학생들과의 좋은 추억이라며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얘기했다고 하네요. 언젠가는 모두 돌려줄 날이 있을 거라고, 그게 자신의 가장 큰 행복이고 자산이라고 말하셨다고 하는군요.


지인은 그날 시계를 맡기고 술을 진탕 마셨고, 다른 그 학교 선후배들처럼 시계를 못 찾았다고 합니다. 찾아야지 하면서도 잊어버리고, 들러서 술 마시면서도 또 까먹고 그냥 가고. 그런 경우들 많잖아요.

그리고 30년이 더 흘렀지요. 얼마 전 그 맥주집 사장님이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지인은 연락 닿는 친구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분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온 그때 그 학생들로 장례식장은 크게 북적였다고 하네요. 000 호프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주인아저씨도, 시계 가방도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장례식장이 30년 전 000 호프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호프집에서 내던 값싸고 인심 푸짐한 노가리와 번데기, 멕시칸 샐러드 대신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마른안주와 회 무침을 먹었지만 50대 중년들은 그때 그 기억으로 사장님과 000 호프를 얘기하며 밤을 새웠다고 하는군요. 그중에는 아저씨에게 시계를 끝내 찾지 못해 미안하다고 우는 중년들도 있었고.



지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도 20여 년 전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 앞에는 000 라면집이 있었어요. 언제 가더라도 선후배 친구 한 두 명은 꼭 막걸리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그 집에 시계를 맡긴 건 아니지만 외상은 기본이었습니다. 외상을 달고 마시다 돈이 좀 생기면 갚고. 더 먹을 일이 생기면 다시 외상을 하고. 짓궂은 친구들은 자기 이름 대신 친구 이름으로 외상을 달기도 했어요. 주인아저씨는 알면서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시고. (그 집은 지금 생각해도 참 특이한 게 외상 내역을 직접 학생이 노트에 적게 했어요. 누가 누구 이름으로 적는지 사실 체크가 불가능한 시스템이었지만 다들 큰 불만 없이 그렇게 그 집을 드나들었지요)

지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도 정확히 기억은 할 수 없지만 분명 뭔가를 그 집이나 인근 술집에 맡겼다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그게 정확히 뭔지 기억할 수 없고, 이제는 바뀌어버린 학교 앞 풍경과 사라진 가게들 때문에 기억한다 해도 찾을 수 있는 길이 없긴 하지만요.

우리 모두 그렇지 않나요. 인생 구석구석에 남겨진 소중한 기억과 사람들. 그런 것들을 어딘가에 맡겨두고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누군가가 당신이 맡겨놓은 사랑과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사과받고 돌려주길 원하고 있을지도. 제 지인처럼 사과의 시간이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000 호프 사장님의 명복을 빌면서


#호프집 #시계가방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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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집 아저씨의 시계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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