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세 번을 죽다 살아났습니다. 한 번은 나무에서 떨어졌고, 또 한 번은 물에 빠졌습니다. 추운 골목길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살아난 적도 있습니다.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사과없이 살수 있는 삶에 대해, 후회없이 사는 삶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잠깐 그때 일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수십 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첫번째 경험은 7살때 뒷집에서 였습니다. 친구들과 뒷집에 있던 100년은 족히 되는 버드나무에 올라 놀다가 떨어졌습니다. 동네분들이 모두 죽은 줄 알고 놀라 모였는데 기적적으로 숨이 터져 살아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친구들과 장마로 불어난 개울 물에 뛰어들었다가 의식을 잃고 바닥에 가라 앉았습니다. 철부지 말썽꾸러기 시절이었습니다. 대학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학년 때는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진탕 마시고 눈발 날리는 학교 앞 골목길에서 조용히 잠들었습니다. 몸은 얼어 죽어가고 있는데 꿈속에서 봄날 고향 길을 걸으며 얼마나 행복해했던지. 사연을 쓰자면 수백 페이지도 모자랄 터지만 오늘은 죽기 직전 의식 흐름에 대해서만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여러 설들이 있겠지만, 제 경험상 죽기 직전 순간 의식의 흐름은 4단계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맨 처음이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신기하게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평소와는 다르게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2. 그다음은 그동안 살아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초고속 고화질로 돌려보는 영화 같다고나 할까요.
3. 그리고 찾아오는 혼돈과 뭔지 모를 따뜻한 느낌.
4. 마지막은 완전한 무의식입니다. 그냥 의식을 잃고 떠나는 거지요.
다행히 저는 세 번 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나게 됐고, 그때마다 가족들은 지옥과 천당을 경험하며 안도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세 번째 사건 때는 병문안 온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참 대단하네. 너는 죽기도 힘든 팔자인가 보다" 야유인지, 시기인지, 칭찬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저도 부인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뜻하지 않게 죽음 직전을 경험하며 알게 된 사실 중 재미있는 건 죽기 직전엔 좋은 생각만 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동안 재밌게 놀던 순간, 행복했던 기억들이 전광석처럼 스쳐 지나가더란 말입니다. 기분 나쁘거나 후회되는 장면, 힘들었던 부분은 전혀 없었습니다. 세 번 다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늙어죽을 때는 어떨까요. 그때도 즐거운 일만 떠오를까요. 행복한 추억들만 안고 떠날까요. 최대한 그렇게 하고 싶겠지만 뜻대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노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많습니다.
인간은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잘 살 수 없다”
최근 '사과 할 일 없이 살 수는 없을까'하는 질문에 천착하면서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세네카의 '인생론'을 다시 읽고 있는 이유입니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BC 4~AD 65)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로 "남의 허물은 눈앞에 있고, 우리 허물은 등 뒤에 있다" "어렵기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다.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처럼 인생의 정수 같은 명언들을 수없이 남긴 스토아 학파의 거두입니다. 로마를 불태운 '폭군' 네로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둘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세네카는 "인간은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잘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죽는 걸까요. 이게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철학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분노에 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마음의 평정에 대하여> <여가에 대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관용에 대하여> <섭리에 대하여> 등의 에세이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단상을 정리합니다. 그의 문장은 한 문장 한 문장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옆에서 대화하듯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연필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글자처럼 제 심장에 선명한 흔적을 남기는 듯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끝없이 샘솟는 우물에서 시간을 퍼다 쓰기라도 하듯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혹은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는 그날이 바로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부자는 병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면 의사 무릎에 매달려 그 시간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달라고 애걸한다. 그러면서 전 재산을 흔쾌히 투척하겠다고 한다. 자신이 귀한 시간을 낭비하며 평생을 벌어놓은 재산을 그 작은 시간을 사기 위해 내놓는 것이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모순인가.”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른 노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이제 삶의 마지막 끝자락에 와 있다. 돌이켜보건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부부싸움에, 채권자에게, 후원자에게, 질병에 빼앗겼는지 생각해보라. 당신이 의도한 대로, 당신을 위해 쓴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인생을 빼앗았고, 이제 얼마의 시간이 당신에게 남았는지 생각해보라. 아직 갈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 당신은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시간이 다 가버리지 않았는가”
세네카는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미래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일갈합니다.
“우리 인생에선 현재만 있을 뿐이다.미래에 대한 기대로 사는 것은 현재를 사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고, 내일에 기대어 오늘 하루를 낭비하는 것과 같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삶의 적수는 죽음이 아니라 헛된 기대다.기대를 버림으로 우리는 인생이라는 연극의 명배우가 될 수 있다. 인생은 연극과 같으니 중요한 것은 연극의 길이가 아니라 연기의 질이다.”
그러면서 쓸데없이 바쁘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꼬집습니다. 항상 시간이 없다고 불평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시간을 엉뚱한데 펑펑 쓰고, 쓸데없이 바쁜 척하며 살며, 생각 없이 남의 뜻대로 살거나, 부질없는 쾌락에 매달리는 삶을 경계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철학하며, 자기의 의지대로 자신을 위해 시간을 과감히 할애할 것을 권고합니다.
“사람들은 평소 우러러보던 누군가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면 불만을 토로한다. 위대한 인물이 자신을 옆에 앉히고 귀를 기울여 얘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데 어떻게 위대한 타인이 당신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인이 당신을 사랑해주길 바랄 수 있는가.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세네카는 '제자' 네로의 자살 명령에 담담하게 응합니다. 죽음에 초연했던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삶에 스스로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살아서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현실 정치가로서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죽음 앞에서는 소크라테스처럼 초연했습니다. 그런 그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려면 평생이 걸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는데도 평생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세 번을 죽다 살아났지만 저는 아직 그런 위대한 깨달음에 미치지 못합니다. 다만, 세 번의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시간이 언제든지 예고도 형태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자각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지금, 현재를 살아보려 합니다. 세네카의 가르침처럼, 호라티우스의 시구처럼.
현재를 잡아라, 내일은 최소한만 믿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후회도 적을 것이고,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삶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번거롭게 남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상황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있을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