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오버액션’ 사과도 필요합니다

상대가 무안해할 정도로 사과하는 것도 방법

by 이리천

얼마 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타계했습니다. 10년 넘는 투병생활 끝에 88년 영욕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눈에 띄는 ‘오버 액션’ 사과를 한 리더라는 데는 아마 이견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의 별명은 ‘물태우’입니다. 무색무취. 자기주장 없이 잘 참고 기다리기가 장기인 무던한 사람이었습니다. 몸이 약해 운동은 잘 못해도 휘파람 잘 불고, 노래 잘하는 감성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어쩌다 육사에 들어가 고향 친구 전두환을 만났고 12·12와 5·18을 주도하며 제5 공화국의 실세가 됩니다.


만년 2인자였던 그가 대통령까지 오른 이유는 어쩌면 물 같은 그의 천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은 죄가 많은 전두환은 퇴임 후 그를 보호할 사람으로 비교적 물렁한 노태우를 선택했습니다. 노태우는 대통령 재임 시절 '물태우'라는 별명에 대해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는 과정을 보면 물의 힘은 참 크다. 물 대통령이라는 별명 참 잘 지어줬다고 생각한다”라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정치적 코너에 몰리자 친구이자 정치적 스승이나 다름없는 전두환을 청문회장에 앉혔고, 결국 백담사로 유배 보냅니다. 퇴임 후 그 역시 불법 비자금 조성과 5·18 내란죄 등으로 전두환과 함께 나란히 재판정에 서고 구속됩니다.


그가 1995년 불법 비자금 조성 혐의로 정치권의 공격을 받을 때 발표한 게 바로 오늘 소개하고 싶은 대국민 사과문입니다. 이 글은 어떤 권력자나 기업인, 민간인이 쓴 글보다 낮은 자세로, 아니 비굴할 정도의 자책 모드로 쓰인 게 특징입니다. 한 때 한 나라 국정을 맡았던 지도자의 글로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도입 문구부터가 그렇습니다.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사과 같지도 않은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대통령들의 사과문과 다릅니다. 물론 당시는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숨겨놓은 사실이 발각돼 전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사과문은 파격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권을 위해 수 백, 수 천명을 죽인 전두환이 40년이 넘도록 진심이 담긴 사과 한마디 없고, 고개 숙이지 않는 것과 비교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 서있는 것조차 말로는 다 할 수 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국민 여러분의 기대와 뜻을 무참히 저버린 이 사람이 무슨 말씀을 드릴수 있겠습니까...(중략).... 대통령으로 자임하던 5년 동안 약 5000억 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되었습니다....(중략).... 쓰고 남은 통치자금이 저의 재임 당시 1700억 원가량 됐습니다...(중략)... 단 한 푼이 남더라도 이를 나라와 사회에 되돌려 주어 유용하게 쓰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여러 가지 상황으로 기회를 놓치고만 것입니다...(중략)...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내리시는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겠습니다. 어떠한 처벌도 어떠한 돌팔매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당국에 출석하여 조사도 받겠습니다....(중략)... 지금 이 순간 전직 대통령이었던 것이 한없이 부끄러울 뿐입니다....(중략)... 재삼 국민 여러분 앞에 무릎 꿇어 깊이 사죄드립니다.”




사과문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내용의 구성입니다. 사과문으로서 갖춰야 할 '5R 공식'을 제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5000억 원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한 것과 쓰고 남은 돈을 되돌려 주지 않은 것 등 자신의 잘못을 적시(Recognition)하고 있고,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라며 책임 소재(Responsibility)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전직 대통령으로서 한없이 부끄럽다”거나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끄럽고 참담하다”는 등의 표현으로 양심의 가책(Remorse)을 표현하고 있고, 충분한 배상(Restitution)은 어떠한 심판과 돌팔매도 감수하겠다는 표현으로,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Repetition)는 당국에 출석해 조사받겠다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국가 지도자로서 내놓은 사과문 중에서는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절절한 내용도 여론을 움직였던지 노태우는 수감 2년 1개월 만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고, 그 후 추징금 2628억 원을 16년간 모두 나눠 갚은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떠나면서도 자신의 용서를 비는 유언장을 공개했습니다. 유족이 공개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랍니다. 장례는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해 주기 바랍니다. 제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유언장 내용이 본인의 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가족이 10년 동안 병원서 투병생활을 하던 그의 평소 뜻을 그런 식으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요한 것은 대국민 사과문과 같이 유언장 역시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왜 본인이 살아 있을 때 5·18 피해자들이나 유가족들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았는지를 문제를 삼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른 것에 반대했습니다. 일리 있는 얘기입니다. 아직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피해자 입장에서 충분히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망자도 그 부분에 대해 살아생전 충분히 사과하지 못한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노태우의 계엄군과 맞서 싸웠던 박남선 시민군 상황실장은 빈소를 찾아 화해와 용서를 얘기했습니다.


고인이 아드님을 통해 수차례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한다는 얘기를 했다. 지역이나 계층, 정치 세력이 이제는 하나 된 대한민국을 위해 오늘을 기점으로 화해하고 화합하고 용서했으면 한다”


용기 있는 사과 노력이고, 감동적인 화해의 제스처입니다.

한 시대의 마감을 담담히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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