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하면 되지?... 놉, 사과는 과학이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과 공식 5R, 배워두면 남습니다

by 이리천


얼마 전 정치인 Y가 사과 문제로 뭇매를 맞았습니다. 리더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기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전두환은 12.12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 왜 그러느냐. (전문가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군에 있으면서 조직 관리를 해봤기 때문에 맡긴 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의는 둘째 치고라도, 집권을 위해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어떤 식으로든 평가했다는 것 자체가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문제는 그 후입니다. 여론이 들끊는데도 그는 이틀 동안 사태를 뭉갰습니다.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라고 대응합니다. 결국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서야 겨우 사과에 나섭니다. 그때도 “사죄드립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감입니다”라거나 "송구합니다"라고 애매모호하게 표현합니다. 시기도 늦었고, 사과 방법도 틀렸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과 같지 않은 사과 후에 인스타그램에 돌잡이 때 사과를 쥔 사진, 애완견에서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려 공분을 사게 됩니다. ‘제정신이냐’는 비판이 쏟아지며 여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야당 대표 조차 "상식을 초월한다" "착잡하다"고 혀를 찰 정도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정치인 Y 만큼이나 사과 문제로 더 큰 곤욕을 치른 건 KT 일 것입니다. ‘exit’라는 한 단어 명령어를 프로그램에서 빼먹어 4000만 명 넘는 이용자들을 1시간 반 넘게 패닉 속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 모두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가 터지는 과정이 어처구니없고, 잊을 만하면 그런 사고가 반복되니 사과를 하고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전 테스트도 없이 중요 장비를 교체했고, 교체 과정에 백업도 안 해 놨고, 밤에 하라는 작업도 낮에 강행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중요 업무를 하청업체에 맡겨놓고 KT 직원들은 나 몰라라 했던 겁니다. 3년 전 KT 아현동 통신구 화재사고 때와 ‘빼박이’입니다. 매뉴얼을 무시한 ‘안전 불감증’, 공기업 시절 타성이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KT 대표는 연신 사죄하고 재발 방지와 과감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여론은 싸늘합니다.


사과는 어렵습니다. 일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교감 과정입니다. 교감이 안되면 아무리 백배사죄해도 소용없습니다. 정치인 Y처럼 부적절하고 진정성 없는 사과는 오히려 역효과를 냅니다. KT처럼 '말로만 하는' 사죄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죄송한지, 그래서 어떻게 느끼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지 등이 구체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사과는 상대를 움직이는 게임입니다. 과학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4A’ 공식도 있고, ‘5 W 1H’도 있고 ‘5R’ 공식도 있습니다.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저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과 제 의견을 합해 ‘내용은 5R, 형식은 TPL’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우선 5R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과할 때는 ①구체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적시(Recognition) 한 후 ②그게 자신의 책임(Responsibility) 임을 인정하고 ③상대방이 공감할 수 있는 양심의 가책(Remorse)이나 죄책감을 표현해 줘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기본입니다. 더 중요한 건 ④충분한 보상과 배상(Restitution)과 ⑤재발(Repetition) 방지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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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Recognition(인정)


사과할 때는 “미안해”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그 뒤에 왜 그런지 명확하게 이유를 달아주는 게 좋습니다. “어제 말도 안 되는 일로 무턱대고 화부터 내서 미안해” 라든지, 저처럼 “말도 안 하고 살림 통장에서 돈 빼서 미안해”, 아니면 “시킨 일을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못해 일을 망쳐놨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식으로 이유를 명확히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사과받는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유야 어쨌든’이나 ‘만약 그랬다면’ ‘그렇지만’ 같은 조건문이나 사족은 절대 불가입니다. 할 말은 많겠지만 참으세요.


②Responsibility(책임)


남의 책임으로 전가할 생각 말고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해야 합니다. 상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이 당신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일단 뒤로 물러서세요. 언젠가는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상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③Remorse(가책, 죄책감)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에게 그 일로 인한 본인의 상실감이나 양심적 가책, 죄책감 등을 표현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배우나 가수, 정치인들은 그렇습니다. 그때는 좀 과하게 해도 좋습니다. 사과의 기본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세우지 마세요. 배우 최민수 씨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배우 2008년 이태원에서 70대 술집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다 폭행죄로 불구속 입건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누가 용서하겠습니까...(중략)... 자존심이 센 놈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죽는 게 더 편할 것입니다.”

‘죽는 게 더 편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진심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듣는 대중들은 “저렇게 까지 자책하고 있구나”하고 공감할 겁니다. 사과할 때는 자신을 완전히 바닥으로 던져버리는 게 좋습니다.


④Restitution(보상)


사과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보상입니다. 전문가들이 실험을 해봤습니다. 아이트래커(눈동자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장치)를 통해 실험 참가자들이 사과문의 어느 부분에 가장 주목하는 지를 살펴본 거지요. 수 차례 다른 경우로 실험한 결과 가장 열독률이 높은 부분은 보상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어떻게 얼마를 보상할지, 앞으로는 어떻게 대처할 지등에 가장 관심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가 연이은 급발진 사고에 대해 사과한다면, 반드시 따라 붙여야 할 사항은 그래서 보상은 어떻게 할지, 리콜은 어떤 일정으로 실시할지 등입니다. 그 부분을 가장 열심히 읽는 거지요. 그게 빠지면 사과는 하나 마나입니다.


⑤Repetition(재발 방지 약속)


앞으로 재발방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할지 약속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개인들의 경우는 “내가 노력할게.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라는 정도로도 끝날 수 있습니다. 신뢰가 깨진 연인이나 부부는 좀 더 구체적인 노력을 열거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이나 정부의 경우는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떤 조치를 할지를 열거해 신뢰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주는데 결정적인 방법이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백 마디의 사과나 해명보다 정확하게 담당자와 연락처를 말미에 붙여 놓는 게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과를 어떤 형식으로 전달하느냐도 내용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타이밍(Timing)과 주체(in Person), 그리고 길이(Length) 입니다. 그 부분은 다음 기회에 정리해보겠습니다.


사과가 공식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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