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는 살인범을 만난 후 실신했고, 그의 딸이 일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다 말고 박차고 나온다.
영화는 내내 묻는다.
진정한 사과를 받지 않고 용서가 가능한가.
진정한 사과를 받는다면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애당초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한다는 게 가능한 걸까.
영화 [밀양](2007년)을 다시 봤다.
다 알다시피 이청춘의 소설 [벌레 이야기]가 원작이고, 이창동 감독이 만들었다. 전도연이 송강호와 함께 나왔고, 이 영화로 전도연은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참고로 송강호의 명연기도 일품이었지만 기생충처럼 거기서도 아무상도 못 받았다ㅜ)
각설하고.
영화를 본 이유는 사과와 용서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요즘 들어서 한 달에 두 세편 정도? 그런데 전도연의 이신애 연기가 깊이 뇌리에 각인됐던 모양이다. 서른 세살의 여자가 남편을 잃고 내려간 남편의 고향(밀양)에서 아들을 유괴로 잃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연기.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몰입됐다. (몰입한 게 아니라 몰입됐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보는 내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봤다. 내가 이신애라면. 내 아이들을 죽인 살인범을 알고 있다면. 그가 스스로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내가 그를 처단할 가능성이 없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느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
“이미 용서받았다는데 내가 뭘 더 용서하느냐”
이신애는 사과받지 못하고 울부짖는다. 실성한 것처럼 소리치고, 물건도 훔치고, 이웃 남자를 유혹하고, 부흥회를 망치고, 결국 칼로 팔목을 긋는다.
의문은 남는다. 만약 신애가 살인범을 안 찾아갔다면? 살인범이 신애에게 울면서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다면? 그렇다면 신애는 평화를 찾을 수 있었을까?
사과와 용서에 관한 다른 작품이 있다. '나치 헌터'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시몬 비젠탈(1908~2005)이 쓴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1976)이다. 비젠탈의 자전적 에세이에다 그가 세계 각국 다양한 인사들을 만나 용서에 관해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유대인 수용소에 수용됐던 비젠탈은 죽어가는 나치 장교가 용서를 받고 싶다고 고백하자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나선다. 그는 89명의 친척이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도저히 용서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비젠탈은 그 후 ‘어떤 죄인이라도 죽음을 앞두고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용서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가’라는 고민에 평생 얽매어 살았다. 잡지 <뷰어스(Viewers)>의 문다영 기자는 작자의 말을 빌어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나’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내 결론은 이렇다.
사과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말로만 용서해 달라? 용서가 안된다. 사과와 용서는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쌍방이 되려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가해자 입장에서 보상을 위한 충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과는 어려운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