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방 담은 꽤 높다. 건물을 빙 둘러 키 큰 측백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그 안쪽으로 넝쿨 가시를 얹은 3미터 가까운 높이의 시멘트 담벼락이 서있다. 밖에서는 모르지만 안에서 보면 마치 요새 같다.
박찬우는 담장을 넘으며 새삼 놀란다. 담이 이렇게 높았던가. 오랜 시간 그곳에서 놀았지만 그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모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시점의 차이일까. 안에 있는 사람과 외부인의 시각차? 달라진 입장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손을 잡고 올라온 정애라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긴다. 과거로 돌아가려던 생각의 흐름이 끊긴다. 아,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여자다.
정애라와의 첫 만남은 기이했다. 퇴근 후 숙소인 호텔로 막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커피를 들고 나오는 여자와 어깨를 부딪혔다. 어머. 어이쿠, 어쩌지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옷에 엎지른 커피를 털며 일어나는 정애라를 자신도 모르게 거의 안듯이 일으켜 세웠다. 블랙커피로 흰 블라우스가 거의 반쯤이나 얼룩졌다. 뜨겁기도 하려니와 속이 다 비친다. 민망한 상황이다. 잠시만요, 제가 집이 여기니 갈아입을 옷을 좀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은데. 단호한 거절이 아니다.
그들은 그 후로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는 사이가 됐다. 이상하게 찰떡 호흡이다. 처음 만난 당일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이는 27. 인근 언론사 근무하는 4년 차 기자. 화장기 없는 민낯에, 질끈 묶은 포니테일 생머리. 170 가량의 휜칠한 키. 조금만 꾸며도 길거리 시선을 다 받을 미모다. 나이 차이도 크지 않고 주량이 얼추 비슷한 데다 신라방에 대한 관심까지 여러모로 죽이 잘 맞는다. 어제도 둘은 밤늦게까지 신라방 얘기를 했다. 그리고 술자리 막판에 정애라가 술병을 탁자로 내리치며 결론을 냈다. 담을 넘자고요.
정애라는 박찬우를 처음 본날 뒤를 밟았다. 그가 들어간 호텔에서 이름을 알아냈고, 곧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대학 친구로부터 그가 나이 서른의 갓 부임한 검사라는 사실을 들었다. 사시도, 연수원 성적도 우수한데 왜 굳이 고향인 K시 지청 근무를 자원했을까? 고향서 영감 소리 들으며 좀 뻐기고 싶었나? 아니면 나중에 고향서 출마하려고? 그런데 왜 오자마자 신라방 주변은 얼쩡거렸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애라는 나름 작전을 세웠다. 우연히 부딪히는 시추에이션. 뻔한 수법이었지만 의외로 쉽게 걸려들었다. 만나보니 거의 맹탕에 가깝다. 경계감 제로. 술 몇 잔 들어가니 술술 불기 시작했다. 가계 족보부터, 학창 시절 친구들, 신라방과의 관계, 최근 연애사까지. 한 달 정도 만나니 레퍼토리를 거의 다 외울 지경이다. 뭐, 나도 그랬을 수도. 여하튼 부담 없는 남자다. 허우대도 나쁘지 않고. 그러고 보니 어제는 술자리 끝에 살짝 내 입술에 뭔가 닿은 것 같기도 하다. 그게 그의 입술이었는지, 손이었는지 가물하다. 아, 내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집중하자. 집중. 그때 박찬우가 담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거의 포옹하듯 안아 받는다. 정애라는 짜릿한 전율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떤다.
사실 그들은 지난 한 달간 신라방 정보를 캐는데 매달렸다. 업무 시간과 퇴근 후 틈틈이 알아봤고, 저녁자리에서 내용을 공유했다. 그러나 성과가 별로다.
정애라는 신라방 주위 가게 사람들은 물론, 경찰서 시청 사람들을 훑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느냐며 오히려 되묻는 사람뿐이다. 그렇다고 예삐 죽음 때문에 의심이 된다고 얘기하기도 그렇다. 너무 갖다 붙이는 꼴이다. 회사 선배나 부장에게 물어봐도, 무슨 일이냐, 지역 명물인데 웬만하면 곤란하게 하지 말자, 저번 인터넷 단신 기사 때문에 사장에게 주의까지 받았지 않느냐며 핀잔만 들었다. 신라방은 취재하면 할수록 치외법권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다.
박찬우도 벽을 느끼긴 마찬가지다. 서울 본청에 2년간 근무하면서 중국인 마약범의 입에서 신라방이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얘길 언뜻 들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이제 막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법원·검찰·로펌 시보를 거친 초임 검사에게는 자신에게 할당된 사건을 챙기기에도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본청 근무를 마치고 K시로 내려오기 직전 당시 사건 기록을 봤다. 그런데 마약범의 발언 기록이 없었다. 당사자도 당시 무혐의로 바로 풀려났다고 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선배 검사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바쁜데 나중 다시 얘기하자고 피하는 눈치였다.
K시에선 더하다. 세무서나 경찰, 시청, 국정원 쪽까지 알만한 사람들에게 넌지시 신라방 관련 특이 사항을 물었지만 한결같은 반응이다. 신라방이라면 워낙 평이 좋은 가게 아니냐, 성실 납세자이고, 지역 봉사에도 열심이고, 모범 향토기업 아니냐는 칭찬 일색뿐이다. 맞는 얘기다. 아마 그도 그 일이 아니었다면 토를 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미영의 그 살벌했던 눈빛, 창고 안의 이상한 풍경, 중국 마약범의 발언 등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뭔가 있다. 내가, 아니 K시 사람들이 모르는 거대한 뭔가가.
그래도 건진 게 아주 없는 게 아니다. 신라방 인근 가게 주인들에 따르면, 사장 김미영 씨가 프로에 가까운 골프 실력이고,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지역 유지들과 골프 모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분점없는 단독 매장인데도 밀가루나 해물, 채소 등 재료들을 K시뿐 아니라 전국에서 공급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파편화된 정보로는 부족했다. 그런 정보를 관통하는 뭔가를 찾을 수 없다. 답답한 두 사람은 어제도 “냄새가 나긴 나는데…” “무슨 방법 없을까요” 라며 서로 애꿎은 술잔만 기울였다. 그러다 소주병이 식탁 한쪽 모서리를 다 채워갈 즈음, 불콰하게 취한 정애라가 난데없이 소주병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소리친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잖아요. 우물이 있는 창고로 가보자고요. 거기에 뭔가 실마리가 있을 거 같아요. 담을 넘어요.
그렇게 박찬우는 15년 전 울면서 떠났던 그 신라방 창고 앞에 다시 섰다. 창고 주위엔 신라방의 2층 건물과 크게 떠오른 달뿐. 인기척이 없다. 그러나 박찬우는 만능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창고로 들어가면서도 어디선가 살기 어린 눈빛이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