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방의 비밀⑤ 회화나무의 추억

by 이리천

정확히 15년 만이다. 박찬우 검사는 신라방과 인근 전경을 실눈으로 새삼스레 샅샅이 훑어본다. 오랜만에 돌아온 K시는 떠날때 그대로다. 빛바랜 풍경 같은 도시 모습도, 그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신라방 건물도, 그 신라방을 에워싼 나무들과 그 가운데 넉넉한 품으로 건물 뒤꼍에 우뚝 서 있는 회화나무도. 달라진 게 있다면 어느덧 지나간 시간과 자신 뿐이랄까.

그는 신라방의 쌍둥이 형제, 왕희성 왕희우와 죽마고우였다. 왕 씨 형제는 모두 공부와 담을 쌓고, 놀기 좋아하는 개구쟁이였지만 공부 잘하는 박찬우를 좋아했다. 성적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불의에 맞서 옳은 소리 하기 좋아하는게 죽이 맞았다. 그들은 학교에서도, 방과 후에도 그들은 껌딱지 마냥 붙어 다녔다.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게 회화나무다. 신라방 뒤꼍에서 하늘을 향해 아름드리 뻗은 그 풍성한 자태.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는 신라방과 잘 어울리는 그런 나무였다. 희성의 아버지 왕기학은 나무에 오르내리는 아이들을 위해 판자로 마루를 만들고 지붕을 얹어 나무 위의 집을 만들어줬다.

그들은 거기서 컸다. 매미 잡고, 수박 먹고, 책 읽고, 레고 블록 쌓기 놀이를 하고. 때로는 싸우고, 그러다 지치면 잠들고. 그곳은 천국이자 아지트였다. 은밀한 비밀도 공유하는. 인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야한 잡지를 처음 본 것도 거기였다. 가난하고 쓸쓸했던 박찬우는 그곳이 자신의 집보다 편안했다. 자기 집처럼 생각할 때도 있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세상의 모든 의미 있는 순간은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 의미는 까마득히 잊힐 때 쯤에야 문득 깨닫게 되는 법인가. 어느 날 발톱을 깎다 거스러미가 눈에 거슬려 잘라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번뜩 생각나는, 또는 자다가 베개를 고쳐 베기 위해 고개를 쳐들다가 갑자기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미스터리같은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박찬우와 신라방과의 관계도 그랬다.


그 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 중학생 박찬우는 방과 후 빨리 회화나무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서늘한 나무 위는 최고의 피서지였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부엌 선반 위에 있는 접이식 군용 단도가 눈에 들어왔다. 몇 해 전 해외 파병지에서 죽은 아빠의 유품. 어제 할머니는 그걸 보여주며 한참 고인에 대해 얘기해줬다. 왕 씨 형제에게 그 얘길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그곳’으로 단도가 떨어진 것이다. 왕희성 부모가 유일하게 그 집에서 출입 금지했던 그곳, 나무 밑 창고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고, 그 실수로 인해 그와 신라방 관계가 그렇게 바뀔 줄은 당시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흥분된 얼굴로 막 호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려던 찰나였고, 마침 왕희우가 '뭐야'하며 성급히 달려들었다. 작고 손때에 절어 반짝이는 그 물건은 그의 손을 벗어나 바닥 틈을 거쳐 텅텅 소리와 함께 창고 지붕 틈 사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때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그와 왕 씨 형제는 ‘대담한’ 결단을 내렸다. 몰래 꺼내자.


왕 씨 형제가 소리없이 열쇠를 가져왔고, 겹겹이 잠겨있는 창고문을 땄다. 그리고 그들은 창고 안에서 벽을 타고 걸려있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장비들과 난데없는 우물을,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발견했다. 절대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뿌듯함과 경고를 무시한 데서 오는 터질듯한 불안감, 어른과 비밀을 공유하게 됐다는 자부심이 뒤엉킨 홍조 띤 얼굴로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 눈빛. 한 번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무시무시한 눈빛. 싸늘하면서도, 어딘지 비열하며, 상대를 공포로 압도하는 눈빛. 15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악몽 속에 밟히는 눈빛. 왕희성의 엄마이자 신라방의 사장 김미영은 그런 눈빛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그 눈빛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렸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게 끝이라는 것을. 그 눈빛은 그녀가 더이상 눈으로 인사를 받아주던 친절한 신라방 사장님이, 시간 될 때마다 회화나무 집으로 간식을 올려주던 친구 엄마가, 근접할 수 없는 미모로 어린 그의 가슴까지 설레게 했던 여인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 바로 박찬우와 신라방, 그리고 그 가족들과의 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었다.


박찬우는 감당할 수 없는 자책감과 슬픔, 의문을 안은 채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그 후 신라방에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그때 그 행동이 왜 그런 결말로 이어졌는지 내내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침 그 해 가을, 큰아버지의 부름으로 할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간 박찬우는 그런 질문과 자책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에 매달렸고, 법대 입학과 사업고시 합격, 군 복무, 사업 연수원을 거쳐 검찰 본청 근무까지, 엘리트 검사 코스를 착착 밟았다.


그러다 근무를 자청해서 15년 만에 돌아오게 된 K시. 그가 그렇게 말없이 금의환향 하던 날, 또 다른 우연을 가장한 운명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겪어야 할 수많은 고난의 서막을 알리는 필연이었을까. 그것도 신라방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소문에 똑같은 의문을, 아니 더 강렬한 의심을 막 갖게 된 여인과의 만남이니 말이다.

정애라는 그렇게 신라방 맞은편에 있었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통유리 너머로 신라방 주변을 얼쩡거리는 수상한 남성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가 마치 예삐를 죽인 범인이라도 되는 듯이. 여차하면 달려가 멱살을 잡아 패대기를 치고, 뺨을 후려칠 것 같은 분노에 찬 눈으로 보면서.

박찬우와 정애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신라방만큼이나 알 수 없는 불안한 기운 속에 막 시작되고 있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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