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청년 왕기응이 K시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은 1935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지 4년째고, ‘전시 총동원 체제’ 아래 조선에서 쌀 쇠 동물부터 사람까지 쓸만한 것은 모두 탈탈 털어 전쟁터로 실어 나르던 시기였다.
그해 가을. K시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는 나무판자 위에 얹혀 떠다니는 검은 물체를 발견해 걷어 올렸다. 다시마나 미역 줄기 정도 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었다. 가난과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배를 탔던 중국 청년. 허기와 추위에 지쳐 널브러진 모습이 시체나 다름없었다. 함께 배를 탓던 사람중 풍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였다.
중국 산둥성 등주 인근에 살았던 왕은 항상 신라방(新羅坊)*과 신라인의 역사를 듣고 자랐다. 자신에게도 신라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조선에 가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초주검으로 조선에 오게 될 줄은, 그리고 그 후 뜻하지 않은 일생의 기회를 만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왕이 K시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특이한 구걸 방식 때문이었다. 가게 주인에게는 일본어로, 손님들에게는 중국어와 한국어로 구걸했다. 교역이 발달한 중국 산둥성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가능한 재주였다. 그런 그가 시내 일식당을 나서던 포목상 거부(巨富) 히로쓰 게쯔샤브로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걸인들과 차원이 달랐다. 가까이서 보니 눈빛이 살아있었다. 거둬만 주면 뭐든지 다 하겠다는 눈이었다.
히로쓰는 왕을 하루 종일 곁에 두고 부렸다. 아침 일어날 때부터 잠자리 들 때까지 시중들게 했다. 왕은 정규 교육은 못 받았지만, 똑똑했다. 일본 말까지 잘 알아듣고 눈치가 빠른 데다 성실했다. 계산에도 능했다. 시키는 일은 어떻게든 해냈다.
한 번은 아이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는데 히로쓰가 도저히 시간을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왕은 바쁜 주인을 대신해 학교 선생을 만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히로쓰는 부인에게 얘기를 전해 들었지만 칭찬하지 않았다. 히로쓰는 점차 왕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 왕은 히로쓰 밑에서 신뢰도 얻고, 착실히 돈도 모았다.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히로쓰는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10년 가까이 수족과 같았던 왕에게 일본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왕은 조선에 남겠다고 했다. 히로쓰는 포목상 건물과 땅, 그리고 값나가는 가구들을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값에 왕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정식으로 매매 계약서를 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훗날 적산(敵産) 불하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한 배려였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일본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히로쓰는 떠났다. 왕은 포목상을 계속했다. 그러다 한국 전쟁이 터졌고, 인천 상륙작전 직전 인천에서 화교들이 K시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왕이 산둥성 고향 친구 후이를 만난 게 이때다. 여차여차해서 인천에서 중국집 주방장을 하던 후이는 왕에게 포목점 대신 중국집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마침 인구도 불고, 중국집 바람이 불어 왕도 눈여겨보던 차였다. 둘은 후이가 인천에서 알던 다른 중국인 주방장을 하나 더 채용해 중국집을 열기로 의기투합한다.
1952년 가을. K시에는 더 이상 전쟁의 그림자가 없다. 왕은 포목점 건물을 허물고 중국집 건물 개조에 나섰다. 어릴 적 산둥성에서 봤던 것처럼 2층 객잔(客棧) 형 건물을 짓기로 했다. 개방된 1층 홀의 천장을 2층까지 트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방들이 벽을 타고 위치하는 형태다. 홀 천장에는 각종 등과 장식들이 달리고, 2층 방을 나와 난간에 기대면 1층 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가게를 생각했다. 공사비가 만만찮게 들겠지만 히로쓰 밑에서 착실히 모은 돈과 포목상으로 번 돈을 합하면 문제가 없었다.
이름은 이미 후이가 중국집 얘기를 꺼낼 때부터 생각해뒀다. 신라방. 언제부턴가 만약 자신의 이름으로 가게를 한다면 신라방이라고 짓고 싶었다. 자신의 잊어버린 핏줄과 과거를 되찾는 느낌. 왕은 그만한 이름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후이에게도 의견을 묻지 않았다.
관건은 시간이었다. 늘어가는 중국집들 때문에 여름이 끝나자마자 공사를 바로 시작했고, 땅이 얼기 전에 끝낼 요량이었다. 돈이 더 들더라도 인근 목수들은 모두 불러 모아 속도전으로 나가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그해 초겨울,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터 닦기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곡괭이질을 할 때마다 철문 깨는 소리가 난다고 했다. 인부들이 달려들어 땅을 파보니 우물이 나왔다. 그것도 육중한 철문으로 닫힌.
왕은 우물을 보자마자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머리끝에서부터 척추를 따고 흘러 내려오는 싸한 전율. 며칠 전부터 꿔 온 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꿈에서 죽은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계속 업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물 안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그래, 분명 뭔가가 있어.
왕은 그날 일을 서둘러 마치며 인부들에게 아무한테도 이 일을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특별히 100원짜리 지폐(군 간부 월급이 1만 원 하던 시절)를 돌렸다. 골치 아픈 공사 거리가 나왔다며 툴툴거리던 인부들은 뜻밖의 횡재에 쾌재를 불렀다. 막거리 한 사발씩 걸칠 생각에 노래를 부르며 공사장을 빠져나갔다.
왕은 저녁에 혼자 우물에 들어갈 볼 생각이었다. 저녁을 평소보다 더 힘줘 챙겨 먹었다. 횃불과 사다리를 둘러매고, 허리춤에는 군용 칼을 찼다. 눈빛은 17년 전 K시에서 히로쓰를 만날 때 그 광채 그대로였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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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방(新羅坊)
신라시대 당나라에 있던 신라사람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 산둥성에서 장수성까지 널리 분포해 있었다. 산둥성 등주(登州)에 위치한 신라방이 가장 컸고, 당나라는 여기에 총관까지 파견해 다스렸다. 장보고가 서해와 남해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신라방이 무역 요충지로 더 번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