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방의 비밀⑩ 지원군 'ㅋㅋㅋ'

by 이리천

박찬우가 발신자 불명의 메일을 받은 것은 수요일 점심식사 후였다. 아무런 설명 없이 정애라의 사진 수 십장만 첨부돼 있는 메일. 그녀가 출근하는 모습부터 회사에서의 일상, 외부 취재원을 만나는 모습, 자신과의 저녁 자리 풍경, 그리고 죽은 그녀의 강아지 사진까지. 누군가가 정애라를 거의 24시간을 감시하는 내용이었다.


두말할 것 없는 경고 메시지다. 정애라가 위험하다. 시계를 본다. 정애라는 오늘 연차를 내고 골수회를 알아보러 골프장에 간다고 했다. 지금쯤이면 오전 라운딩이 끝났을 시간. 정애라에게 전화를 해본다. 긴 신호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나온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차를 타고 힘껏 액셀을 밟는다. 운전대를 잡은 손과 오른쪽 장딴지에 힘이 들어간다. 차 계기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속도가 얼마인 지 알 수도, 관심도 없다.


정애라는 최근 상당한 정보를 건졌다고 좋아했었다. 골프를 담당하는 스포츠부 선배 회식자리에 우연히 합류하는 척했다가, 그 선배와 따로 2차 자리를 잡았다. ‘황제주’를 유독 좋아하는 노땅 선배. 음료수 ‘자황’에 국산양주 ‘임페리얼’을 알탄으로 넣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 ‘임페리얼’ 한 숟가락 얹은 폭탄주다. 그걸 한 입에 털어 넣는데, 두 세 잔이면 십중팔구 인사불성이 되는 독주다. 선배는 석 잔을 마신 후 그로기 상태가 됐다. 그 후부터 정애라의 질문에 순순히 모든 걸 불었다고 했다.


정애라는 그 선배가 알려준 골프장에서 많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김미영의 동반자 중에 자신이 근무하는 신문사 사장이 끼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신라방 취재가 번번이 막힌 이유였다. 낯이 익은 시민단체 의장과 세무서장, 그리고 다른 두 팀 멤버까지 모두 12명이 점심을 먹기 위해 클럽하우스 룸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막 나오는 길이었다.


정애라는 차가 평소보다 반응이 약간 느리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출발했다. 그리고 골프장을 막 빠져나온 후 첫 삼거리에서 갑자기 시동이 꺼져 버렸다. 그때 좌측에서 달려오는 검은색 세단. 빨간 신호등인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어어. 왜 저러지. 빨리 차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생각과 달리 놀란 몸은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차가 부딪히면 오른쪽 낭떠러지로 그대로 굴러 떨어질 판이다.


박찬우가 정애라의 빨간색 G 쿠페와 그 오른쪽에서 정애라 차를 향해 달려가는 검은색 세단을 발견한 게 바로 그 때다. 머리를 쓸 틈도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 액셀을 있는 힘껏 밟는다. 세단이 쿠페를 덮칠 찰나, 박찬우의 SUV가 아슬아슬하게 세단 앞쪽 보닛을 먼저 들이받는다. 귀를 멍하게 만드는 둔탁한 충격음과 불꽃, 그리고 흩어지는 자동차 파편들. 방향이 틀어진 세단은 그대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낭떠러지 밑으로 곧두박질친다.


아수라장이 된 사고 현장. 조금만 늦었어도 끔찍한 결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 이 도시에선 안전한 곳이 없다는 얘긴가. 박찬우는 토끼 눈을 뜨고 정신이 나간 듯한 정애라를 안아 자신의 차로 옮겨 태웠다. 어디로 가야 할까. 시동을 걸며 머리를 굴린다. 그래, 거기라면 괜찮을 거야. 처참한 모습의 SUV는 막 내리기 시작한 비를 뚫고 시야에서 황급히 사라졌다.




김수현이 박찬우와 정애라가 있는 과수원 별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2시경. 박찬우 전화를 받자마자 서울에서부터 거의 시속 200킬로로 밟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양파 인형 같은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너저분한 퉁퉁한 얼굴, 거기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와 엉덩이.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기괴하게 번쩍이는 눈빛이 아니라면 누가 보더라도 소파에서 스낵과 피자, 영화, 게임으로 살만 불린 백수 청년 이미지 그대로다.


그의 머리는 비상했다. 상황을 듣자마자 하이 톤의 쉰 목소리로 깔깔대며 웃어대는 소리가 박찬우의 전화기 너머로까지 들려왔다. 오랜만에 ‘살 떨리게’ 흥미로운 사건을 만나게 됐다며 해야 할 일부터 차례로 불러줬다. 일단, 위치 추적이 불가능하게 핸드폰 전원부터 끌 것, 두 번째, 각자 회사에서 전혀 의심하지 않을 이유를 대고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낼 것, 세 번째 자신이 도착했을 때 먹을 스낵과 저녁 야식거리, 그리고 작업에 필요한 책상을 준비할 것.


과수원에 도착한 김수현은 새 핸드폰 두 개를 박찬우와 정애라에게 던져준다. 각자 가지고 있는 폰은 소각 처리하라고 얘기와 함께. 그리고 브레인스토밍. 난상토론 끝에 결론에 도달한다. 전쟁. 다른 옵션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한다. 김수현은 2시간 동안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적을 알아야 전투를 할 것 아니냐며.


박찬우가 김수현을 만난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명문대학 법대 수재였지만 컴퓨터와 통신, 인터넷 등에 빠졌던 이단아. 전공보다는 일명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해킹 실력을 겨루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괴짜. 컴퓨터에 대해 배울 만한 교수들의 강의를 듣기 위해 무려 전국 11개 공과대학에서 청강한 외골수 후배. 졸업 즈음 그는 이미 국내 인터넷 해킹 분야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수가 돼 있었다.


김수현은 졸업 후 고시나 취업 대신 컴퓨터나 인터넷 관련 프로젝트를 수주해 밥벌이하는 자유인의 길로 들어섰다. 평소 자신을 "파트너인 존 왓슨을 못 만난 21세기의 셜록 홈스"라고 소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김수현이 단순한 컴퓨터 전문가나 해커가 아닌, 아이디 'ㅋㅋㅋ'로 해외서도 알아주는 인터넷 지하세계의 실력자임을 아는 이는 박찬우 외에 많지 않았다.

박찬우는 김수현이 작업에 들어가고, 정애라가 잠시 잠든 사이 밖으로 나왔다. K시에서 1시간 거리의 한적한 산골 마을. 새벽 과수원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안개가 사과나무 가지가지를 포얀 속살로 감싸 안고 있다. 모친과 언니 동생 하며 친자매처럼 지내던 옆집 이모님의 아들, 맹지현이 운영하는 곳이다. 맹지현은 그가 K시로 부임한 후 유일하게 연락한 동향 사람이다. 왕 씨 형제처럼 죽고 못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불편한 몸에도 항상 따뜻한 미소로 그를 대해주던 이웃집 형이다. 이모님이 돌아가신 후 시내 집과 가게를 팔아 홀로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규모는 들었던 것보다 커 보였다. 과수원은 야트막한 야산 두 개에 걸쳐 널찍이 벌려 있고, 그 중간에 그의 아담한 단독 주택이 있었다. 박찬우 일행이 묵는 별채는 산 뒤쪽에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앞부분이 거의 반파된 차량과 낯선 여자. 그리고 한밤중에 들이닥친 반(反) 미치광이 모습의 청년. 그래도 맹지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애라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한 번도 경우 없는 짓을 해 본 적이 없는 동생이라서요”라며 빙긋이 웃기만 했다.


박찬우가 어제저녁 과수원에 도착해 처음 전화한 것은 김수현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상관인 K시 검찰 지청장에게 신라방 관련 인지 내용을 살짝 공유하며 긴급 수사 필요성이 있지 않겠냐고 떠봤다. 정애라의 말 대로였다. 신라방을 가지고 왜 계속 문제를 만들려 하느냐, 지금 얼마나 바쁜 때인지 알지 않느냐, 일단 출근해서 얘기하자고 길길이 뛰었다. 그 역시 신라방에 매수된 네트워크 일원임에 틀림없다.


결론은 분명해졌다. 어떻게든 스스로 지키고, 공격할 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상대는 김미영과 왕 씨 형제, 신라방과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없는 범죄 카르텔, 그리고 그들과 얼기설기 얽혀있는 지역 권력 네트워크다. 그들과의 물리적 대결은 어렵다. 여론전이 필요하다. 그 싸움에 김수현 만한 인물이 없다. 졸업후 수년만의 전화였지만 김수현은 어제 통화한 것처럼 반갑게 받았다.


박찬우는 뭔가 행동으로 나서야 할 때 그동안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이번 또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도. 새벽은 어느새 짙은 어둠을 지나 과수원에 아스라한 온기로 햇볕을 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쟁의 아침은 그렇게 밝았다.


(1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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