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우와 정애라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신라방 우물 밑에 이런 비밀 통로와 거대한 호수라니. 거기다 조명 시설과 물건을 실어 나르는 레일, 잘 정돈된 선박 접안 시설까지. 도대체 이런 곳에 왜 이런 시설이 필요할까. 그제야 박찬우는 15년 전 김미영의 눈빛이 왜 그랬는지 깨닫는다. 그가 못 볼 걸 봤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눈에 큰 마대 자루가 들어온다. 두 사람은 입을 틀어막는다. 시체다. 피투성이의 시체. 죽은 지 얼마 안 됐다. 피가 아직 응고되지도 않은 채다. 그때 근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배다. 박찬우는 순간적으로 정애라의 입을 틀어막고 물로 뛰어든다. 머리만 내놓는다.
배에선 두 세 명의 떡대가 알 수 없는 중국말로 대화하며 내린다. 왕 씨 형제의 어깨너머로 배운 중국어 실력으로 그게 “조심해” “배고프다”는 시답잖은 대화라는 정도는 안다. 한참 담배 피우고 떠들던 그들은 마대 자루를 싣고, 뭔가를 내려놓고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정체불명 박스엔 암호 같은 메모가 붙어있다. 중국 간체자(簡體字)와 숫자 조합이다. 암호같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없다. 포장 안은 뜯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밀봉돼 있다. 들어보니 가볍다. 냄새도 거의 없다. 가루다. 일단 핸드폰으로 주위 풍경과 박스 메모를 저장한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두 사람은 저녁 자리를 할 시간도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낸다. 정애라에겐 취재 지시가 갑자기 밀려들고, 박찬우는 K시 인근 지청과의 기업 횡령사건 공조 수사를 배당받는다. 인사 시즌이 앞이라며 지청장은 박찬우를 눈에 띄게 닦달한다.
일주일 후 겨우 만난 두 사람은 답답하고 어리둥절하다. 우물과 지하호수, 시체, 선박, 정체 모를 가루와 암호 그리고 중국인들. 거기에 김미영의 골프 모임과 전국으로 이어지는 거래선까지. 범죄 조직의 냄새가 진동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문제를 접근해야 할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갑자기 떨어진 수많은 업무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소주 각 2병을 마쳤을 즈음, 정애라가 갑자기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상한 게 있어요. 출근길이건 퇴근길이건 못 보던 얼굴들을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요. 특히 퇴근 후 집 앞 편의점이나, 친구가 와서 밖으로 나왔을 때 그런 느낌이 더 하다는 것이다. 정애라를 혼자 둬도 되는 걸까.
이튿날, 박찬우는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는다. 왕희성이다. K시에 온 지 한 달도 넘었지만 주저했던 전화. 그날 저녁 호텔로 찾아온 왕 씨 형제는 “어떻게 전화도 안했냐. 이 **놈아” “너, 진짜 죽을래, 의리없이” “자식이 아주 못되게 변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악의 없는 몸싸움과 주먹질까지 그대로다. 그리고 이어진 술자리.
왕 씨 형제는 지루하다고 했다. 중국에서 새로운 요리를 배웠고, 짬뽕이 아니라 새로운 메뉴를 개척해 신라방을 키울 생각이고, 어쨌거나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일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연애 얘기와 운동, 지금은 사라진 회화나무 집까지.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어색함. 15년이나 되는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그러나 그들 모두 안다. 그들 사이를 밀어내는 게 시간만이 아님을. 그 오랜 시간만큼이나 다른 서로의 세계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박찬우는 술에 취했지만, 우물과 지하동굴, 시체, 그리고 어느새 김미영처럼 변해버린 그들의 눈빛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왕희성은 요즘 골치가 아프다. 한 달 반전쯤 박찬우가 돌아온 이 후로 신경 쓸 일이 부쩍 많아졌다. 마담(김미영 사장을 내부서 부르는 존칭)에게 보고하지 않았지만 박찬우, 정애라 모두 골치 거리다. 정애라는 살짝 고양이로 경고했는데, 오히려 그 후 더 난리다. 손봐야 할 타이밍을 놓쳤다. 박찬우 때문이다. 둘이 붙어 다니며 계속 문젯거리를 만들고 있다. 빨리 손을 봐달라고 하소연하는 꼴이다.
둘이 창고에서 나올 때, 아니 지하호수에서 바로 처리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큰 화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가슴 한 편에선 몇 안되는 인간적 추억마저 없애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때 마담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사실 왕희성에겐 그리 추억이 많지 않다. 고등학교를 마칠때쯤 어렴풋이 감잡고 있었던 조직에 대해 김미영으로부터 설명을 듣게 됐고, 동생과 함께 바로 중국으로 보내졌다. 중국 10대 국립대학 중 하나인 산둥대학에 입학, 영어와 일본어 등을 배웠다. 동시에 조직 관리 수업도 병행했다. 위조와 변장, 위협, 살인 등 조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현장 실습을 통해 배웠다. 김미영에 버금가는 '능력'을 평가받을 즈음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찬우가 오기 전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다. 조직사업을 은폐하기 위한 사업으로, 신라방 대신 더 새롭고 업그레이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약이나 매춘, 위조지폐의 시대는 갔다. 인터넷과 로봇, 인공지능, 메타버스, NFT 등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다. 왕희성은 새로운 기술과 인력으로, 한국 조직을 아시아 중심으로 끌어올릴 큰 그림에 가슴이 벅차 있었다. 적어도 박찬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박찬우와의 만남은 예상대로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어릴 때 그대로였다. 아직도 공명심만 가득한 철부지. 세상이 뭔지 몰랐다.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마담에겐 설득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정안되면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직 검사를 손대는 것은 쉽지 않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야 한다. 준비가 필요하다. 조직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동안 수없이 행해온 것처럼. 그래도 마지막 선택의 기회는 줘야 한다.
왕희성은 그렇게 박찬우에게 경고장을 썼다.
(10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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