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 Apr 28. 2024

내 첫사랑은 여자애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가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새 학기 첫날부터 여자아이 하나가 전학을 왔다. 작고 마른 체격에 하얗고 눈이 큰 아이였다. 그 아이의 눈은 서른넷이 된 지금도 생생할 만큼 초롱초롱 빛났다. 왠지 그 아이가 특별해 보였다. 10살짜리 꼬마 눈에도 특별해 보였으니, 다른 아이들 눈에는 오죽했을까.


 이미 그 아이는 전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아이들의 미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전학생이라는 타이틀뿐만 아니라 그 아이는 무언가 특별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그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조금 어른스러웠고, 특유의 상냥함이 있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공부도 잘했다. 담임선생님도 그 아이를 예뻐했다. 비록 10살이었지만, 교실 안의 모두가 어렴풋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전학 온 지 며칠 만에 그 아이는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가장 친해지고 싶은 아이가 되었다.


 당시 나는 소심하고 말도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래도 한 번 크게 마음을 먹으면 종종 대담해지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에게 지기 싫어했고, 남자아이처럼 굴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짧은 숏컷을 하고 온 동네 남자아이들과 싸움을 하던 골목대장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남자아이같이 구는 나를 귀여워했지만 초등학생이 될 무렵 머리를 기르라며 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여자아이처럼 치마도 입어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떻게 하고 다니던 크게 간섭하지 않으셨지만, 쌍둥이로 태어난 여자아이를 쌍쌍이 예쁘게 입히고 싶었던 욕심은 조금 있으셨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앨범을 보면 얼굴은 늘 상처투성이에 심술궂은 표정으로, 쌍둥이 여동생과 같은 치마를 입고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다. 동네 놀이터와 공원을 제패하며 남자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던 머시마 같았던 짧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머리를 기르고, 예쁜 옷을 입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조신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나의 짧은 영웅담은 끝을 맞이했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가 싫어 초등학교 내내 머리를 묶고 다녔다. 점점 말수도 줄고 목소리도 작아졌으며 성격도 소심해졌다.


 다시 10살 때로 돌아가자. 그렇게 단 3년 만에 소심해진 내가 그 아이와 친해질 수 있었겠는가? 당시 나는 반에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는 옆에 앉은 남자아이에게 먼저 통성명을 하고, 남녀 할 것 없이 반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곧 남자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이 시작되었고, 여자친구들은 그런 남자아이들을 싫어하면서도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느니 하는 얘기만 했다. 아직은 축구와 흙장난이 좋았던 나는 그런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불편했다. 그러나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와 쉽게 놀아주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누구나 큰 목소리로 여자아이들에게 소리칠 수 있었고, 장난을 치는 게 특권인 것 마냥 굴었다. 그 장난의 표적이 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점점 목소리를 줄여야 했다. 말수도 줄었다. 옆에 앉은 남자아이가 불편했고 얼마 안 돼서 여자아이마저도 불편해졌다.


 그래도 원래 성격이 다 죽진 않았는지 누가 시비를 걸어오면 곧잘 싸우기도 했다. 여자아이들과는 싸우지 않았지만 남자아이들과의 육탄전은 종종 있었다. 아직은 체격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싸움이 붙어도 남자애 하나쯤은 위협할 수 있었고, 대부분은 이겼다. 아이들은 나를 말도 없고 조용하지만 건드리면 안 되는(?) 아이로 생각했는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과하지만 나에게는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10살짜리 아이의 시각에서 부끄럽지만, 부모님 외에 태어나 처음 느껴본 사랑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전학 온 그 아이는 우리 반 반장이 되었다. 그 당시 반장이란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으며 용모도 단정했어야 했다. 인기투표를 했는지 아니면 담임 선생님이 시켰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 아이는 당연하게도 반장이 되어 있었다. 반장이 된 그 아이는 모두에게 공평했고 친절했으며 혼자 있는 아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아이의 친절은 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 아이에게 나는 반 친구 23번 정도쯤이었겠지만, 나에게는 반장이 반 친구 1번이었다. 그 아이를 쳐다보는 횟수가 늘었고, 그 아이와 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린 마음에 그 감정은 당연히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수업이 다 끝난 후 청소 시간이었다. 교실 뒤편 청소함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한 남자아이가 반장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빼앗으며 놀리고 있었고, 여자아이 무리들이 그 남자아이에게 빗자루를 돌려달라며 반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반장은 웃으며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그 남자아이에게 그 빗자루가 좋으면 가져가라고 양보했다. 그러자 그 남자아이는 얼굴이 빨개지며 반장에게 빗자루를 던졌다. 빗자루가 날아와 반장의 얼굴을 가격했고, 몇몇의 여자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왜 그러냐고 그 남자아이에게 소리쳤다. 반장은 조용히 얼굴을 감싼 채 괜찮다고 여자아이들을 달랬다. 반장은 끝까지 울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청소함으로 달려가 떨어진 그 빗자루를 들어 그대로 그 남자아이에게 던지려고 했다. 그 순간 반장이 내 손목을 잡으며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러지 마. 나는 괜찮아. 고마워. 그리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책가방을 메고 집에 오는 내내 반장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때 그 남자아이를 때려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반장이 좋아해 줬을까? 그 남자아이는 왜 반장에게 빗자루를 던졌을까? 같은 의문들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답을 알 수 없었던 어린 나는 내가 남자였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 따위를 했다. 남자가 되어서 반장을 괴롭히고 놀리는 남자아이들을 때려주고, 반장 옆에서 반장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남자아이들 앞에 무기력한 여자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가 남자였다면, 내가 남자가 되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전이라 더 혼란스러웠지만, 겨우 10살이었던 당시 나는 그저 반장이 좋았고, 꼬박 1년을 반장 생각만 했다.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도, 어떻게 찾아오는지도 몰랐던 어린 나이에 그 아이에 대한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아이를 첫사랑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의 첫사랑 이야기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첫사랑하면 예쁘고 잘생겼던 선생님이나 옆에 앉았던 짝꿍, 옆 반의 남자애 혹은 여자애를 떠올리는 것처럼, 나 역시 첫사랑 하면 그 아이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자각은 당시에 하지 못했지만, 이상한 끌림에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으며, 내내 그 아이 생각만 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은하수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그 아이의 이름은 내가 처음 깨달은 사랑의 이름이 분명했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간지러운 10살짜리 꼬맹이의 첫 마음이었다. 그 아이를 만난 이후로 나는 여자아이임에도 같은 여자아이가 좋았다. 당차고 똑 부러진 여자아이, 착하고 눈물이 많은 여자아이, 한 남자아이를 오랫동안 좋아하는 여자아이 등등 수많은 여자아이들을 혼자 몰래 좋아하고 포기하고 슬퍼했다.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남자아이를 좋아한 적이 없다. 내내 혼자 가슴앓이를 한 세월이 10년이다. 청소년기 내내 나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했던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 때문에 암울하다는 건 차라리 행복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였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생각보다 컸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입 밖에도 낸 적 없었고,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도 없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첫사랑이자 정체성의 늪에 던진 첫 의문의 돌이었다.




♪ 커피소년_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