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 Apr 30. 2024

그런데 첫 연애는 남자애?

기뻐야 하는 게 당연한데 내 기분은 그게 아냐

 첫사랑과 순수함이라는 단어는 마치 그 두 단어가 뗄 수 없는 연인처럼 붙어 다닌다. 누구나 첫사랑은 있고, 첫사랑을 생각하면 그게 몇 살이었든 그때를 떠올리며 그땐 참 순수했다고 웃음 질 것이다. 아마 처음이라는 단어는 순수함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지 않을까.


 처음 느껴본 감정은 아무리 10살짜리 꼬마였다고 해도 특별한 경험이었나 보다. 단순히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점점 깨닫기 시작한 건 그 사건(반장에게 이름을 불렸던 날)이 있던 날부터였다. 이성친구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 시기였음에도 나는 단 한 번도 남자아이를 이성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내 관심의 대상은 오로지 귀여운 또래 여자아이들이었다.


 아마 이런 경험이 없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나 혹은 그런 감정을 당시 내가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분명 어렸을 때 한 번쯤 겪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할 것이다. 어른이 된 나조차도 만약 10살짜리 여자아이가 ‘저는 같은 여자아이가 좋아요.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라고 묻는다면 아마 심각하게 듣지 않을게 분명하다. 아직은 여자 혹은 남자라는 성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알 리 없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감정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어린아이의 불확실한 감정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자기감정 일지도 모른다. 아직 부모를 제외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순수한 어린 시절의 감정은 때 묻지 않은 가장 나다운 감정일 테니까. 더욱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부모보다 주변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슬슬 주변 친구들이 관심 있는 남자아이 얘기를 하는 게 당연해질 나이였다. 이성에 대한 감정이 주변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가까운 감정을 마주한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감정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나 역시 그 당시에 느낀 감정은 그냥 친구에 대한 감정일 것이라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은 점점 이성친구에 대한 관심이 늘어갔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갈수록 여자아이들의 관심은 점점 연애로 쏠렸다. 아직 성숙한 여자아이들을 따라가지 못한 남자아이들처럼 나 역시 연애보다는 남녀 구분 없이 뛰어노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래도 꼭 반에 관심이 가는 아이가 있었다. 이는 연애에 관심이 생긴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그 대상이 나와 같은 여자였을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초등학교 최고참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날로부터 고작 3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쩍 자랐다. 또래 친구들이 이성에 대해 고민할 때 나는 동성에 대해 고민했고, 어렴풋 그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남들과 다른 고민을 하는 만큼 다른 내면이 내 안 어딘가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린 나이었다. 그냥 여자가 좋은 채로, 그렇지만 평범한 친구인 채로 그들의 곁에 있고 싶었다.


 가끔은 남자아이에게 관심이 간 적도 있었다. 가령 나는 내 짝꿍이었던 남자아이와 종종 운동장에서 같이 뛰어놀며 친해졌는데, 그 아이와 노는 시간이 좋았고 빨리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설마, 나 짝꿍을 좋아하는 걸까? 드디어 나도 친구들에게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겼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그동안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이 갔던 이유는 단순히 동경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조금 들떠 있었고, 친구들도 역시 그것 보라며, 나처럼 선머슴인 애가 제일 먼저 남자친구가 생길 거라고 하지 않았냐며 나보다 더 즐거워했다.


 결국 나는 내 짝꿍에게 고백을 받았다. 방과 후 청소시간에 친구들 몇 명과 남아서 청소를 하고 있는데 같은 반 남자아이가 나를 불렀다. 그 아이는 복도 끝 계단으로 가보라며 나를 재촉했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혼자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계단 아래 내 짝꿍이 서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 상자를 열어보니 예쁜 종이로 접은 작은 학 몇십 마리와(지금 생각해 보니 설마 백 마리였을까?)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대뜸 사귀자며 고백을 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을까? 당연히 예스였다. 드디어 나도 보통 여자아이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 따위 이제 더는 갖고 싶지 않았다. 나도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좋아하는 남자애 얘기나 하며 그들과 같다는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고 싶었다. 다시는 남들과 달라지고 싶지 않았다. 처음 받아본 고백에 설레기보단 주변 분위기에 어울릴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짝꿍과 사귀기로 했다. 초등학생의 연애가 어땠겠는가? 당연히 사귀기 전과 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내 짝꿍이 축구를 잘했기 때문에 여자친구인 나를 기꺼이 끼워주었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사실 말이 연애지 그때 당시(2000년대 초반) 초등학생들은 휴대폰도, 마땅히 연락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난 후 같이 운동장에서 놀거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게 전부였다. 참 순수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한 달 후 나는 짝꿍에게 이별을 고했다. 사실 짝꿍과 사귀기 전부터 반에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누굴 사귀던 그 아이는 전혀 상관없었겠지만, 나는 왠지 그 아이에게 남자친구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고, 가끔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결국 처음 생긴 남자친구도 내 고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순 없었다. 그 남자아이는 첫 연애라기 보단, 처음으로 사귄 남자 단짝친구 정도로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이별을 고했음에도 내 짝꿍은 여전히 나에게 다정했으며 좋은 짝꿍이 되어주었다.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할 때도 나를 빼놓지 않았고, 방과 후에도 종종 같이 놀기도 했다.


 어쩌면 남들과 다른 고민을 너무 빨리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내 짝꿍은 나에게 ‘남들이 말하는 진짜’ 첫사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부동의 첫사랑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도무지 꿈쩍 할 줄을 몰랐다. 내 첫사랑이었던 그 아이처럼 그저 묵묵히 나를 다정하게, 조금은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남들처럼 행복할 때도, 남들보다 불행할 때도 있겠지만, 그 어떤 것도 잘못되지 않았다고. 그날 이후 느낀 감정들 전부 그대로 괜찮다고. 좋아하는 상대는 누구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고, 좋아하는 마음 역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때 스스로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 델리스파이스_고백


매거진의 이전글 내 첫사랑은 여자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