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일기, 손편지, 시 같은 것을 끄적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보다 사색을 깊게 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찾기는 영국에서 예쁜 정원을 찾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허세를 가득 담은 글을 보면서 자기만족을 하기도 했다.
노트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은 글쓰기가 훨씬 쉬워졌지만 하나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꽤나 집중이 필요한 일이기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꾸준히 나의 글을 써본 것은 출산 후 아이 백일까지의 육아일기가 다였다. 13년 동안 나의 글이 아니라 공산품이기를 요구받는 보고서를 쓰면서, 그렇게 매일 글을 쓰는데도 글쓰기에서 멀어졌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근무나 주말 출근이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직장이지만, 그래도 심신이 완전히 마모되기 직전에 영국 유학이라는 기회를 주었다. 내 한 몸만 책임지면 되는 삶, 문자 그대로 어두운 겨울을 빼면 자연이 충만한 환경, 마치 일하는 것처럼 과제를 하다가도 눈을 돌리면 나뭇가지가 사락거리는 정원이 있는 집. 바로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샘솟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고, 'impersonal'해야 하지만 그래도 보고서보다 조금 더 내 것이라 괴로워도 재미있었던 대학원 에세이에 매진하고, 외식을 감당할 수 없는 환경에 소위 '돌밥돌밥'을 하다 보니 어느덧 7개월이 흘렀다. 사실 모든 것은 핑계이고 되새겨보면 글을 쓸 시간은 충분했고, 오기 전의 다짐에 비해서 가족에게 충실하지도 못했다.
글쓰기란 기억하고 성찰하고 판단하고 정제하는 작업이다. 푸석푸석해진 내 마음은 오롯이 나를 위해서 이 작업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글쓰기는 또한 하나의 습관인데, 마침 방학을 맞은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 할 수 있을까? 내 글을 쓰면서 기억과 성찰과 판단을 해나가야 마음도 회복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많이 메마른 상태이고 재능의 한계도 있기에 파인 다이닝 같은 글은 엄두를 낼 수 없겠지만, 매일 먹을 수 있는 볶음밥 정도는 만들어보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흘러 40대 중반이 된 지금, 마음이 메마르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자의식도 많이 깎여나갔다. 조금은 더 오늘에 집중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너무 빠져들기보다는 적당히 털어내고 주위나 가족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당분간 볶음밥 같은 여행기나 영국 생활에 대한 글을 조금씩 써보려 한다. 계속 글을 쓸 수 있고, 글을 씀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2022.4.22. 영국 캔터베리 시골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