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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너머 Jun 23. 2022

40대의 대학원 고르기

노교수님의 지혜

1년 전 (이맘 때는 아니고 3월경) 영국 대학원에 지원할 때를 되새겨보면 인생의 시점에 따라 선택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20대이고, 이후 학문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후 임용에 도움이 될 곳을 선택해야겠지만 나는 이미 40대이고, 아이가 있고, 이후 직장 복귀도 해야하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다. 더구나 특수한 제약 때문에 1년 과정이 대부분인 영국에서 2년 석사를 찾아야했는데, 법학이나 경영학 과정을 빼면 선택의 문이 매우 좁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곳은 지금 다니고 있는 켄터베리 소재의 A대학과, 런던에 있는 영국에서는 사회과학 분야 명문대라고 하는 B대학이었다. A대학의 장점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비와 주거비(B대학에 갔다면 2년 간 자비로 4~5천만원 더 부담해야 함), 조금 더 내 직업과 관련이 높은 전공, 당시 생각하기에 학업 스트레스가 조금 덜할 것 같다는 점이었고, B대학의 장점은 이름값(한국에서는 옥스브리지가 아니면 잘 모르긴 하지만)과 런던이라는 엄청난 인프라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걸로 고민했나 싶지만, 영어 성적으로 학비 지원을 조금은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B대학을 그냥 포기하기 아깝기도 했다 (A대학은 학비가 저렴해서 학비 지원을 더 받을 필요가 없음).  


그리고 추천서를 받아야하는 시기가 되었다. 미국 대학들은 3개의 추천서를 요구한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영국 대학은 1~2개만 요구하고 있어 하나는 직장 상사에게 받고, 나머지 하나는 한국에서 했던 석사 지도교수님께 받기로 하였다.


A대학은 교수님 추천서가 없어도 되는 상황이었고, B대학에는 필요했기에 B대학 추천서를 부탁드리면서 이것저것 진행상황과 여건을 말씀드렸다. 굳이 일로 바쁜 중에 교수님 추천서를 받으러 갔던 걸 생각하면, 그때만 해도 영국의 엄청난 생활비에 대한 실감을 하지 못하고 B대학 쪽으로 60% 정도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석사 지도교수님은 국책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학교로 옮긴 분이신데,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 업데이트해나가시고 현장과 연구모임도 오랜 기간 운영하며 소통하신 훌륭한 분이시다. 교수님 방에 찾아가면 늘 직접 정리한 통계를 여러 가지 보여주시는데, 왜 이걸 아직 직접 하시냐고 여쭤보니 자료를 직접 다뤄야 감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대학원 강의도 명강의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찾아뵙지도 못하다가 부탁이 있을 때야 찾아간 제자에게 그 연륜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조언을 해주셨다. 추천은 당연히 해줄 수 있지만 B대학은 다시 생각해보라고. 개인정보가 될 만한 내용을 빼고 얘기해보자면, 교수님께서는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대학에서 박사 유학을 하셨는데, 당시 비싼 물가와 학업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지방 소도시에서 박사를 했던 다른 친구는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인정받으면서 공부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결국 다 같은 박사였다며, 굳이 힘들게 B대학에서 공부하는 게 맞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나를 보내고 나서도 걱정이 되셨는지, 다음날 아침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B대학은 추천하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소중한 기회이니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는 곳, 현지 사람들과 많이 소통할 수 있는 곳, 여행 다니기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A대학의 여러 장점을 지인에게 듣고서도 B대학 쪽으로 흔들리던 내 마음을 한순간에 A대학으로 쏠리게 한 조언이었다. 다시금 메시지를 보내실 때까지 고민의 깊이가 느껴져서 더 와닿았나보다. 카카오톡이 한번 날아가는 바람에 그 명문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B대학은 추천자를 매우 귀찮게 하는 시스템인데, 추천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추천 대상자의 역량을 5점 척도(였던 것 같다)로 꽤 많은 항목에 대해 입력하도록 한다. B대학에 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도, 정작 이 척도는 다 만점을 주셨다고 하니 진심으로 나를 위해서 해주신 조언이었던 것 같다.


대학원 공부의 밀도에 따라 그 후 연구자로서의 경로도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아마 20대나 30대 초반의 제자에게는 다른 조언을 해주셨을 것 같다. 교수 입장에서 명문대를 권하기는 더 쉬울테지만, 경험 많은 노교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아이가 있는 40대 직장인의 삶에 정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사실 교수님께서 제시해주신 기준에 비하면 영어 성적으로 학비 지원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 따위는 너무나 사소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선택의 기로에서 아까운 것을 버리지 못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아까운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교수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둘 다 합격은 했지만, A대학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너무나 만족한다. 캔터베리는 아기자기하고 비교적 안전하면서 런던으로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한 곳이다. 생각보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양이 많아 한번씩 '이럴 거면 B대학 갈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안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B대학보다는 여유가 있는 것 같고, B대학을 갔으면 통학으로 버리는 시간이 많았을테니 아쉽지 않다. 물론 지금도 아슬아슬한 통장잔고를 보며 느끼는 안도감이 가장 결정적이기는 하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내가 앞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나가야 할지 알려주신 교수님께서는 올 여름 은퇴를 하신다. 지혜로운 교수님께서 삶의 2막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 궁금하다. 오랜만에 안부인사를 드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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