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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Jan 17. 2020

애증의 자매관계

그래도 유일한 내 평생 친구이길

나에게는 두살 위의 언니가 있다. 언니 생일이 빠른 관계로 학년은 3년차이. 적당한 터울로 잘 어울리며 지내온 무난한 관계의 자매지만 서로 성격이 달라 2,3년에 한번쯤은 박터지게 싸운다.


어릴때는 여러모로 언니와 트러블이 많았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시대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관계로 둘째마저 딸이라는 비난을 주구장창 받아야했는데, 같은 여자지만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 비난을 피해간 언니가 왠지 얄미웠다. 게다가 엄마는 이상하게도 위계질서를 매우 강조했는데, 난 언니에게 대들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언니한테 기어오르지 말라는 잔소리를 밥먹듯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보다 학업성취도가 높았던 내가 언니를 무시할까봐 엄마가 선방 조치를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엄마의 '언니 기 살리기' 조치는 나에게 상처였다.

학교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와도 엄마는 잠시 광대승천 하는듯 하더니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너, 언니한테 이런거 자랑하지 마라. 그리고 너가 아무리 공부 잘해도 언니가 늘 더 똑똑하다는거 알지?" 라고 강조하셨다. 언니보다 3년 뒤로 계속 같은학교를 진학했는데, 늘 새학기마다 "선생님들 눈에 잘 띄어야 해. 네 언니가 반장을 자주 했으니 넌 등교하자마자 선생님한테 '제가 김땡땡 의 동생이에요.' 라고 말하렴. 그럼 선생님들이 알아봐주실거야" 라고 종용하셨다. 나는 전교1등도 자주 하고 매년 반장을 도맡아 했으므로 굳이 언니의 동생임을 부각시키지 않아도 내 존재를 알릴 수 있는데, 여하튼 엄마가 시키는대로 제언니는 누구랍니다, 를 연발하고 다녔다. 심지어 음악학원에서 나간 콩쿠르 대회에서 은상을 차지했음에도, 엄마는 축하한다는 말 보다도 예선 실격한 언니가 상처받을까봐 기쁜 티를 내지 말라는 말을 먼저 했다. 축하선물로 인형을 사주긴 하셨는데 언니에게는 더 크고 예쁜 인형을 사주신건 당연지사. 트로피를 받아오던 날, 내 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수명이 다해 어두워진 형광등을 바라보며 선물받은 인형을 갖고 노는데 왠지모르게 꽤 씁쓸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렇듯 나에겐 성과에 대한 칭찬이나 보상이 없고, 아무리 잘해도 '언니는 늘 너보다 똑똑한 존재' 라는 비교를 당해야했으며 언니의 그림자처럼 살기를 강요받았는데, 그게 나에게는 언니에 대한 미움과 질투,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졌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관계가 지속된건 마찬가지였다. 언니 성적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엄마는 언니가 엄마생각보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자 뛸듯이 기뻐했고, 내 성적이 월등히 좋아 내심 굉장한 기대를 걸었던 엄마는 내가 생각보다 못한 대학교에 진학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객관적인 대학 종합 순위에 의하면 내 학교가 언니학교보다 순위가 높았음에도 우리집에선 언니는 대학 잘간 애, 나는 대학 못간 애 로 분류되었고, 학교 앞 과일빙수집 유무를 가지고도 '너네학교앞에는 그런것도 없냐'는 식의 비하를 당했다. 그리고 언니는 대학 다니는 내내 과대표, 어학연수, 배낭여행, 대학원 진학 등 하고자 하는 모든걸 누렸고 나는 딴마음 품지말고 고시나 준비해서 대입 실패를 만회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다 알고있다. 엄마도 날 많이 사랑하시고, 언니때문에 내색을 잘 안했다 뿐이지 속으로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기대한 바가 워낙 컸던 만큼 대입 결과가 실망스러우셔서 고시 패스라는 더 명예로운 결과를 둘째딸이 물어다주기를 간절히 바라셨다는 것을. 그게 내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믿으셨을테니까.


하지만 지속적으로 바닥치는 자존감을 지닌 채 원치 않는 공부를 하는건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결국 휴학 2년동안 시간만 낭비한 채 복학했고, 마지막 학기에 취업준비에 몰두해서 지방공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는 동안 언니는 계약직으로 취업했다가 결혼과 출산 후 정규직 제안을 거절하고 퇴사하여 전업주부로 살게 되었고, 나는 회사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직이나 자격증 준비로 바쁘게 사느라 결혼을 일찍 했음에도 아이 갖는걸 미뤘다.


같이 살지 않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사는 모습이나 선택의 방향이 달라서일까. 언니랑 점점 그 어떤 감정도 나누지 못하게 되었다. 여전히 친한 자매지만, 나는 회사얘기만 언니는 육아얘기만 하니 서로 공감할만한게 없었다. 그리고 언니는 두살터울의 아이들을 독박육아로 키워내며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맨날 늦는 형부에 대한 맹비난, 아이들의 작은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죄없는 다른가족들에게도 조금만 거슬리면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나는 언니가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부도 늦고싶어 늦는게 아니고 일하느라 힘들텐데 왜 저렇게 못잡아먹어 안달인걸까, 작고 사랑스런 아이들한테 저렇게 맹수처럼 소리를 질러야 하는걸까, 도와주러 온 엄마한테 대체 말투가 왜저럴까. 가장 이해가 안된건 정규직 보장을 받고 복직한지 한달도 안되어 아기가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뒤도 돌아보지않고 퇴사해버린것. "애가 아프면 일이고 뭐고 다 못해. 너도 애 낳으면 명심해." 라는 말이 참으로 나약하게 들렸다. 애야 감기에 걸렸다가도 낫는거고, 큰병도 아닌데 직장을 포기하다니. 그저 일하기 싫어서 애를 핑계로 편하게 살고싶은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언니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다가 어느덧 나도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안는법도 모르고 수유하는 자세도 어설프고 트름을 못시켜 아이를 토하게 만들고는 어렵다고 엉엉 울어버리는 내 옆에서 언니는 능숙하게 내 아이를 돌보고 나를 다독였다. 무심한 말투로, 다 이렇다. 너만 어려운거 아니다. 아이는 이렇게 자라난다 등등 별다른 조언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는 말들을 해주었다. 이제서야 내가 언니와 같은 육아의 삶을 살게 되었고, 그제서야 언니의 입장을 하나씩 이해해 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혼자 아이를 돌보며 누구라도 와주길 바라는 마음에 현관문만 쳐다보는 삶,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를 돌보는데 아이가 투정부리는 소리가 귀에 꽂힐때의 짜증스러움, 장난 치다가 엎어버린 국그릇에 내 이성도 엎어져버리는 순간, 고단해서 안그래도 예민해져있는데 굳이 안해도 될 쓸데없는 조언을 늘어놓은 주변 가족에 대한 짜증과 원망. 그리고... 밤새 열이 난 아이를 아침에 해열제 먹여서 어린이집에 들여보내는 그 속이 타는 마음, 수족구 처럼 등원조차 차단되는 날에는 남은 휴가 갯수를 손으로 꼽으며 대직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물도 못삼키는 아이를 달래며 같이 피폐해지는 마음, 돈 조금 벌어보겠다고 아이를 떼어놓았다가 혹시나 아이에게 불안정한 영향을 줄까 노심초사하게되는 마음, 퇴근 후 유난히 나에게 들러붙는 아이를 보며 내가 이 아이에게 엄마의 정을 온전히 주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등등... 남의 뒷바라지만 하는걸로 만족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 이런 여러가지 고뇌 끝에 퇴사하고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않은 남의 삶을 내 멋대로 비난하고 재단해버렸다.  


아이 둘을 키우는게 너무 힘들어서 네가 둘째를 낳는다면 말리고 싶어. 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언니에게, 그동안 티를 내지 않아서 몰랐는데 언니의 삶은 어땠냐고 묻고 싶었다. 앞으로의 삶도 험난하겠지만 먼저 살아보고 알려주고 같이 상의해달라고 부탁하고도 싶다. 지금이야 육아지만 앞으로 부모님 칠순잔치, 부모님 노후, 부모님이 떠난 후의 남겨진 우리의 삶 등등 공유하고 의논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게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외동아들로 자라온 남편은 날 보며 말한다. 저렇게 성장기 내내 비교당하고 질투와 사랑받기위한 노력에 허덕이느니 혼자 오롯이 사랑받는 외동이 더 행복하다고, 외롭다고들 말하지만 친구를 많이 만들면 되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비로소 느끼게 된 자매의 소중함은 이루말할수가 없다. 부모의 사랑이나 친구의 우정 뿐 아니라 형제의 든든함을 내 아이에게도 알려주기 위해, 그리 망설였던 둘째를 이제는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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