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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Apr 18. 2020

나의 자존감도둑, 엄마.

가장 사랑하기에 가장 상처받는 사람

엄마가 나의 자존감 도둑이라는걸 알아차리고 인정하기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엄마란 존재는 늘 가장 소중하고 가장 큰 사랑을 주며 가장 희생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그녀가 하는 말은 다 나를 사랑해서이고 날 위해서 하는거라는 깊은 신뢰가 무의식중에 근거없이 형성된다. 어지간히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자식 못되라고 채근하는 엄마가 어디있겠는가. 다 나 잘되라고 하는 말이겠거니 하며 순종하다 어느날 고개를 들어보니 나만 상처투성이가 되어있었다.


딸만 둘을 가진 엄마는 '아들 못지않은 딸'을 가져야만 아들을 못낳은 여자로서의 한을 풀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니보다 성적이 좋았던 나는 자연스레 엄마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컸고, 은연중에, 아니 대놓고 노골적으로 내비친 엄마의 욕망, 즉 '열아들 안부러운 딸'이 되어주길 바란다는걸 너무나 똑똑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 목표는 오로지 엄마의 만족, 기쁨이었다. 내가 뭘 바라는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해본 적이 한번도 없이 그저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날 스카이캐슬의 혹독한 부모처럼 기른건 아니다. 마음이 여리고 소심한 성격의 엄마는 그런 모진 부모가 될 그릇도 안됐다. 그저 부드럽고 온화하게 엄마의 소망이라며 말을 전할 뿐이었다. 차라리 매몰차게 명령을 했으면 엄마를 미워할 수라도 있었을 것 같다. 조근조근, 모든건 너가 결정하는거고 네 선택이지만 엄마는 네가 이러이러했음 좋겠다. 라고 부드러운 말투로 시작을 하지만 내가 뜨뜨미지근하거나 영 진도가 안나가면 말투를 조금씩 더 날을 세워 채근하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그 말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이 되고 난 어거지로 끌려가고 있었다.


학창시절엔 내신성적이 아주 좋았다. 이 기세로 몰아치면 내가 자칫 실수하지 않는 한 명문대는 거뜬할거라고 믿었던 엄마는 내가 혹여 나쁜친구들의 꾐에 빠지거나 해서 일탈을 할까봐 걱정이셨다. 그래서 공부잘하는 친구가 아니면 사귀지를 못하게 했다. 성격이 좋든 나랑 얼마나 잘 맞든 우선 공부를 못하면 그 친구를 못만나게 했다. 학교에서 노는것까지 통제할 수는 없으셨지만, 주말에 친구들과 놀러간다거나 할 때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눈치를 봐야했다. 언제까지 걔랑 놀거냐, 누구누구랑 좀 놀아라, 너는 너보다 멍청한 애들이랑만 맞는거냐 등등 학창시절 내내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고3시절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걸어가는게 위험하다며 날 집근처까지 데려다 준 친구와 잠시 서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저쪽 길 끝엔 엄마가 마중나와 계셨고, 혼자 이 어두운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친구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그런 류의 인사를 1분 정도 했던 것 같다. 기분좋게 인사하고 돌아서서 엄마를 향해 가는데, 엄마의 인상이 구겨질대로 구겨져 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떨어진 불호령.

"너 지금 고3인데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몰라? 왜 저런 친구랑 길바닥에서 시간을 버리니?"

내가 길바닥에서 한두시간을 쓴 것도 아니고 날 데려다준 친구에게 감사인사를 한 것뿐인데다 그 친구가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어도 저렇게 말했을까,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저 죄송하다 하고 고개 숙이고 집에 들어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엄마의 기대와 달리 명문대를 가지 못했다. 명문대 자식을 못 가지게 된 엄마는 고시패스한 자식을 원했고, 그것도 요원하게 되자 7급공무원 자식, 나중엔 9급이라도 좋으니 공무원만이라도 되길 바라셨다. 대학 다니는 내내  '하라는 수험생활은 시작 안하고 헛짓거리만 하는' 자식이었다. 엄마 표현에 의하면 '후진 학교'를 갔으므로 동아리 활동도 후진 헛짓거리, 학회 참여도 헛짓거리, 단기해외연수도 헛짓거리였다. 친구들 선후배들도 서로 이끌어줄 좋은 인맥이 못될 후진 사람들이니 교류하는데 시간낭비하지말라 했다. 학교를 다니는거 자체가 후진 활동이었으므로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던가 배움 따위는 아예 없었다. 그저 학사 학위를 따기 위함일 뿐이었다.


또 엄마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난 공무원이 되지 못했다. 그쯤 되니 엄마도 이제 나를 포기하신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취업준비를 시작했고, 수험생활 하느라 못쌓은 스펙을 단기간에 쌓느라 고생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누군가의 강요없이 시작한 공부가 이렇게 재밌을 줄 몰랐다. 수험시절에는 발로 차도 안일어나던 내가 토익 새벽반을 듣기위해 5시에 일어나 예습하고 종로로 달려갔다. 학원이 끝나면 스피킹 스터디를 하고 종로 커피숍에 죽치고 앉아 복습에 매진하거나 입사지원서를 썼다. 그렇게 몇달만에 취업준비를 마치고 나는 지방공기업에 합격했다.


엄마가 아주 오랜만에 뛸듯이 기뻐했다. 공무원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공공기관 아니냐며 만족스러워하셨다. 오랜만에 효도를 해서 나도 기뻤다. 하지만 기쁜 꿈을 안고 입사한 회사가 너무 보수적이고 정적이어서 너무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면 부모자식 연을 끊고 다시는 날 안보겠다는 엄마의 엄포에 그만두지도 못하고 괴롭게 다녔다.


입사 5년차에, 더는 안되겠다 싶어서 엄마 몰래 휴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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