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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Mar 09. 2021

만만한 사람에게 화풀이하기

가까울수록 소중하게.

남편의 요즘 컨디션이 어떤지 확인해보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나한테 짜증을 쉽게 내는가" 이다.

남편은 평소 책을 어마어마하게 좋아해서 모든 지식과 삶의 지혜는 주로 책을 통해 얻는다. 특히 '타인에게 공감하기'는 책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 비로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으로,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책을 통해 접하고 이해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통찰력과 공감능력을 키운다.

그런 놈이.... 아내에 대해서는 그 능력을 상실하는 듯 하다.


남편이 요즘 업무가 몰리고 자격증 준비까지 하는데다 둘째가 신생아라 여러모로 체력이 소진되고 있다는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나도 첫째가 방학이라 애 둘을 혼자 돌보면서 피곤한건 마찬가지다. 나는 그래도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건 타인에게 풀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유년시절 막내로써 제일 만만한 화풀이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맞벌이하는 엄마는 항상 피곤해하셨다. 같이 바깥일을 하지만 아빠는 남자라는 이유로 집안일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다. 굉장히 보수적인 경상도 남자를 아버지로 둔 가정에서 집안일은 오로지 엄마와 두 딸의 몫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게으른 편이었고 나는 엄마의 칭찬을 먹고 살고픈 막내였어서, 자연스레 집안일은 나의 도움+엄마의 폭풍칭찬&부추김+더 열심히 도움 의 알고리즘으로 진행되었다.

하루는 엄마가 야근을 하고 집에 늦게 오시는 날이었다. 늘상 그래왔듯 직장에서 출발하시면서 전화를 걸어 나에게 설거지랑 집안 정리 등을 부탁하시며 엄마가 매우 피곤하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우리엄마가 피곤하다는데!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에 더욱 열심히 집안 정리를 했는데,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설거지 하는걸 까먹어버렸다. 아마도 더 깔끔하게 정리정돈 하려고 흐트러진 물건들을 반듯하게 줄 세우는데 너무 집중을 했던 것 같다. 설거지는 새카맣게 잊은 채로 엄마를 맞이해서 잘 정돈된 집안을 보란듯이 오픈했는데, 주방을 들여다 본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구석구석 반듯한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정리를 했는지는 보이지 않고 설거지가 되어있지 않은 싱크대만 눈에 띄었을 것이다.

바로 엄마의 호통이 벼락같이 쏟아졌다.

"너, 설거지 한다고 했잖아! 왜 안할거면서 엄마를 속여먹여? 한다고 하지를 말던지, 왜 한다고 해놓고 괘씸하게 엄마를 속여먹냐고!!"

그 순간, 나는 엄마를 속이려던게 아니었는데 엄마가 나한테 속아넘어갔다고 느낀다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까먹은거라고, 정말 엄마를 속이려던 게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얼이 빠져서 엄마의 야단을 듣고만 있었고, 엄마는 계속 신경질을 내며 옷을 갈아입고 짜증을 내며 설거지를 하셨다. 나는 그저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 엄마의 화가 풀릴때까지 잠자코 있는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엄마를 붙잡고 내 의도가 그게 아니었음을, 이제라도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봤자 엄마는 화를 그치지 않고 내 말을 안들어줄게 뻔했기 때문이다.


언니도 나를 짜증받이로 쓰기 일쑤였다. 조금만 귀찮게 하거나 언니 심기에 거슬리면 소리를 빽 지르고 신경질을 냈는데, 나는 언니의 예민해지는 표정을 늘 캐치했어야 하고 언니의 지시를 재빠르게 따라야했다. 나에게 언니는 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과대표를 맡으며 만인에게 친절하고 관대한 언니의 모습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언니는 나에게만 짜증스러웠던 것이고 밖에서는 상냥하고 마음 넓은 좋은 친구이자 학생, 반장, 과대표 였던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언니 학교를 찾아가 '여러분~ 여러분이 아는 이분의 실체가 어떤지 아시나요?!' 하고 폭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날인가 언니한테, 언니는 왜 나한테만 못되게 구는거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어쩌라고!!"였다.


이러한 유년시절을 보내 온 나로서는, 자기 몸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 받는다고 아무에게나 짜증내는 사람을 극혐하게 되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스트레스 받게 한 대상에게 따져야지, 왜 엄한 사람(특히 자기보다 약자)에게 스트레스를 푸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해해주겠거니' 가 아니라, 차라리 고민을 털어놓고 힘듦을 표현하여 조언을 얻거나 위로를 받는게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힘든 날에는, 남편과 맥주 한잔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답답했던 마음도 풀어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편이다. 남편도 다정한 위로와 진심어린 조언, 현실적인 해결책 등을 제시해주니 이보다 더 좋은 파트너가 없다.


하지만 정작 남편은 피곤하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나한테 신경질적으로 대한다. 물론 내가 좀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평소같았으면 웃으며 대할법한 일도 짜증을 확 내며 신경질적인 말투로 답하니 나로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경고를 하면 바로 미안해하고 사과하지만, 또다시 피곤한 날에는 어김없이 반복된다.


이해가 안가는 그의 행태에 나도 짜증이 날 무렵, 무심코 첫째에게 마구 짜증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다. 나는 그동안 나보다 확실한 약자를 찾지 못해서 짜증을 못 냈던 것이지, 내가 엄청난 성인군자여서 짜증을 안낸게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아이가 어리니까 말썽도 많이 피우고 청개구리같이 말을 안들어서 날 화나게 한다. 그렇지만 평소 같았으면 조금 너그럽게 받아줄 일도 내가 피곤한 날에는 첫마디부터 가시처럼 쏘아붙인다. 특히 둘째가 태어난 뒤로, 안그래도 갓난아기를 돌보느라 지쳐있는데 겨우 재워놓고 돌아서자마자 큰 애가 시끄럽게 해서 둘째가 깨기라도 하면, 내 안에 이성의 끈이 탁 끊어지면서 큰애에게 어마무시하게 화를 쏟아내버린다.

 

이제서야, 내 눈치를 보고 금방 주눅드는 큰애가 보인다. 그 옛날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짜증만 내는 엄마에게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내 방에서 잠자코 기다리던 내 모습처럼, 어정쩡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러나는 큰애가 보인다. 그 애도 동생이 태어나서 마음이 많이 아플텐데, 엄마아빠가 예전보다 훨씬 더 화를 많이 내니 얼마나 서운했을까.


하루는 바운서에 앉아있는 동생에게 다가가는 큰애를 보았다. 큰애는 그저 동생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우와악!(까꿍~을 의도했던 것 같다.)했을 뿐인데, 둘째가 갑자기 어깨와 손을 화들짝 젖히며 크게 놀라서 악을 쓰며 울었다. 백일도 안된 갓난아기라 너무 크게 놀라면 경기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급히 둘째를 안고 달랬지만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왜 동생에게 달려들어 놀래켰냐고 첫째를 쥐잡듯이 잡았겠지만, 그 날은 왠지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아 그저 둘째를 다독이며 둘째에게 말했다.

"우리 둘째가 많이 놀랐구나. 진정하렴. 형아가 널 놀래키려고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너와 놀아주고 싶어서 그냥 다가온건데, 너가 많이 놀랐구나. 형은 널 사랑해서, 괴롭히고 싶었던게 아니니까 너무 화내지 말고 진정하렴."

이렇게 말하면서 첫째를 슬쩍 봤더니, 첫째 역시 동생이 너무 크게 울음을 터뜨려서 놀랐고,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질까봐 살짝 겁을 먹던 차에 엄마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에 의아한건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어?"

"엄마는 모르는게 없지! 엄마는 우리 OO이를 너무 사랑해서 네 마음도 정확히 읽을 수 있는거야~ 그런데, 아가는 아직 너무 어려서 크게 놀라면 많이 아플 수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동생을 대할때는 조금 조심하자."

이렇게 말해주니 큰애는 씩 웃으면서 응!!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곁에 오은영쌤이 있었다면 칭찬을 한가득 받았을 것 같은 내 대응에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저 작고 어린 내 소중한 첫애에게 이유없이 또는 과민하게 화를 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매사에 오은영쌤처럼 대응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를 화풀이 대상으로 절대 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노력을 거듭하다보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지.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욱 소중하게 대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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