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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Apr 05. 2021

아이 앞에서 울어버렸다

세월 앞에 장사 없는 늙어가는 이야기

평화로운 주말. 갓 백일 된 작은아이는 새근새근 잠을 자고, 큰아이와 나란히 엎드려 종이접기에 한창이던 즐겁고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에, 거실을 지나가던 남편이 나를 보며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쿠, 이게 뭐야. 내 허벅지가 여기 있네!!"

그렇다. 그는 살이 찐 내 허벅지를 가리키며 자신의 허벅지와 두께가 같다고 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아이와 도란도란 종이를 접으며 세상 행복을 만끽하던 나는, 이 행복이 와장창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게 지금 나한테 무슨말을 하는건가. 내가 요새 살이 좀 찌긴 했지만, 특히 살 빼기 어려운 팔다리가 두꺼워져 가뜩이나 고민이었는데, 지금 저걸 저격해서 말하는건가. 아니 근데 나는 둘째를 출산한 지 백일쯤 됐는데 바로 날씬해지기를 바라는 게 더 이상한거 아닌가. 물론 애를 낳았다는걸 감안을 해도 조금 더 심각하게 팔다리가 두꺼워져서 나도 걱정인 마당에, 남편이라는 놈이 굳이 저렇게 대놓고 지적을 해야한단말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데 남편은 마냥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해맑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가벼운 농담으로 넘겨줄거라는 기대에 찬 얼굴로.


그러나 나는 그냥 가볍게 넘겨줄 수가 없었다. 기분이 너무 나빠져서 나도 모르게 접던 종이를 탁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당황한 남편은 나를 뒤따라 들어왔고, 아들은 종이로 덤프트럭을 만들던 엄마가 갑자기 가버리니 쫄래쫄래 완성해달라고 따라 들어왔다.

짜증나서 침대에 누워버리는데, 내 등판에 대고 남편은 절박한 사죄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놀린게 아니고...그냥 신기해서 그런건데.. 아니 신기하다기보다 그냥 귀여워서.. 난 자기가 통통한걸 더 좋아한다는거 알잖아. 미안해..."


뭐라고 변명을 해도 난 이미 기분이 너무너무 상했다. 나는 원래 살이 쪄본적이 없는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먹기는 아주 잘먹는데 마른 체질이어서, 축복받은 몸매 또는 비효율(투입대비 산출이 없어서) 신체의 표본이었다. 학창시절, 살이 잘 찌는 타입이던 언니는 혼자 먹으면 혼자 살이 찔까봐 밤 10시에 나에게 초콜렛을 먹이면서

"너도 먹어. 너가 먹어야 내가 먹을 수 있어."

라고 나를 먹인 후 안심하며 언니도 먹었었다. 그럼 뭐하나, 언니만 살찌고 나는 안찌는걸.

스무살이 넘어가며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면서 내 날씬한 몸매는 더욱 도움이 되었다. 원하는 옷을 맘껏 입고, 원하는 음식과 술을 맘껏 먹어도 난 그대로였다. 통통한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샀다.

입사 준비를 하던 20대 중반에는, 취업 스트레스 때문인지 안그래도 없는 살이 더 빠졌다. 하긴 혼밥을 절대 못하던 20대의 나는, 토익 새벽반을 듣기 위해 새벽별을 보며 집을 나서며 엄마가 입에 욱여넣어준 조미김+쌀밥 몇 덩어리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먹은거라곤 아메리카노 한잔, 당떨어질때 마신 초코우유 한개 정도가 전부였다. 저녁때 집에 들어가 허겁지겁 저녁밥을 먹고 다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면접 준비를 했었다. 밥을 안챙겨먹고 잠을 제대로 못자면 몸의 면역체계가 떨어지는데, 나중에는 중이염, 잇몸염증, 장염까지 와서 피골이 상접한 채로 입사 통보를 받았다.

입사할 당시 최저 몸무게를 찍은 나는, 한줌 같은 허리에 안그래도 말라보이는 검은 정장을 입고 첫 출근을 했다. 그때만해도 적나라한 외모평가가 가능하던 시절이라, 날씬하고 젊은 여직원에 대한 칭송을 받으며 회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제 몸도 마음도 편해진데다 내 나이도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기 시작하며 그 안찌던 살이 야금야금 찌기 시작했다.

말랐던 몸이 살이 찌는 것 만큼 가십거리가 있을까. 마른 몸을 칭송한 사람일수록 살이 찌는 몸에 대한 지적을 심하게 했다. 도대체 내 몸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그렇게까지 볼때마다 지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튼 그때만 해도 살이 찌는건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주눅이 들던 시절이었다.(지금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다. 그렇게 오랜 과거가 아님에도.)

서른이 넘어가며 내 몸이 더이상 예전같지 않다는 걸 느끼고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은 지방을 없애고 근육을 채워주니 더할나위 없었지만, 자격증 준비와 임신 출산으로 더이상 운동을 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첫째를 낳고 나서는 그렇게까지 몸이 불어나는 느낌은 없었는데, 30대 후반에 접어든데다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을 하고 나니 영락없는 아줌마 몸매가 되어버렸다.


미투 운동이 한참 한국을 휩쓸었고, 더이상 외모 평가가 만연하지 않은 시대가 다가왔다. 누구보다도 그런 변화를 환영했고, 외모지상주의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남편은 그런 면에서 더욱 단호했는데, 애초부터 마른몸을 우상으로 여기는 우리나라 문화를 혐오했었고, 마르기만 했던 내가 임신중에 살이 좀 붙자 매우 귀여워했었다. 나는 살이 좀 찐게 훨씬 더 잘어울린다고, 나이가 들고 살이 쪄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내 허벅지를 보며 놀리다니... 그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그렇게까지 두꺼워진 허벅지를 방치해 둔 나에 대한 절망으로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외모에 개의치 않는다고 열심히 외쳤지만,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외치는 여전히 날씬한 나를 꿈꿨을 뿐.


열심히 사과하는 남편과 영문도 모르고 같이 사과하는 아들을 뒤로 하고 돌아누웠다. 그냥 좀 기분 상한채로 남편에게 화풀이 좀 하다가 다시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뜬금없이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서러울 일인가? 하고 생각을 했지만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런게 산후우울증인가 싶었지만, 그것보다도 한창인 나이에 아이 둘을 낳고 경력도 오락가락하지, 체력도 안되는데 관리도 안되지, 부모건 남편이건 자식이건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건 없지, 그런데다 피부도 눈에 띄게 늙고 살은 계속 찌지, 그런데도 탄수화물은 왜이렇게 맛있는지 끊을 생각이 안들고, 게다가 맥주는 '마시는 빵'이라고 할만큼 살이 찐다던데. 그런데 왜이렇게 맥주가 맛있는지. 임신기간동안 술도 못먹었는데 이제 좀 원없이 맥주가 먹고싶은데 이 허벅지는 어쩌나. 그리고 애는 같이 만들어놓고, 자기 애 낳느라 살찐건데 어찌 저렇게 생각이 없나. 정말 오만가지 생각과 원망과 한심함이 뒤섞여 눈물을 펑펑 흘려댔다.


아이는 멋도 모르고 엄마 울지마, 내가 미안해, 빨리 덤프트럭 만들러 나가자 하면서 연신 위로하고 사과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어릴적 엄마의 눈물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기억에 아마 내가 뭔가 말썽을 부렸고, 엄마는 늘 그렇듯이 엄하고 단호하게 나를 혼냈는데, 늦게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를 보자 엄마가 정말 어린아이처럼 아빠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것이었다. 그때만해도 엄마아빠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라고 믿을만큼 어렸을 때였는데, 그런 존재가 엉엉 울다니 정말 충격적이어서 다시는 엄마를 속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겁에 질린 채 다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의 나보다 지금 큰애가 훨씬 더 어린데. 저 작은 아이에게 고작 허벅지 때문에 눈물을 보여서 저 애를 충격먹게 하다니. 더욱 더 한심한 기분이 들어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이 표정을 보아하니 그닥 충격인 것 같진 않지만.. 또 모르지. 내면에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여튼 우여곡절 끝에 남편은 손이 발이 되도록 사죄하고, 자긴 정말 나쁜의도가 하나도 없었고 정말 귀여워서 그런거다, 자기가 산후우울증인거 아니냐 하고 조금 항변했다가, 이건 뭐 딸같아서 그랬다 랑 뭐가 다르냐, 왜 실수는 네가 하고 내탓으로 돌리냐 하며 더 구박을 먹었다. 앞으로 3달은 더 쪼임을 당할 것을 경고하고 볼때마다 퉁박을 주는 걸로 마음은 조금 풀어졌지만 어쩌면 이건 나 자신의 자격지심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스러운 노화를 추구하고 날씬한 몸에 대한 강박이 없다고 자부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젊고 날씬한 나로서 주장한 바 였던거다. 그게 훨씬 더 충격적임을 자각하며, 더이상 외모에 연연하지 않고 내면을 키우는 내가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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