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sdom Mar 16. 2022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

사진찍히듯 기억에 남는 관계와 흔적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다 보면 간혹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생기곤 한다. 그리고 주로 그 장면들은 후회스러운 것들이다.


26살 푸릇푸릇하던 신입사원 시절, 같은 부서에는 서른살  남짓의 쑥맥 남자선배가 있었다. 작은 키에 왜소한 어깨, 토실한 뱃살만 쑤욱 나온, 너무나도 쑥맥이어서 대화할때 상대방의 눈을 못마주치던 착하고 조용한 선배였다.

그 선배와 1년정도 함께 일하며 많이 친해졌는데, 인사발령이 나서 그 선배가 다른부서에 가게됐고 내가 그 선배 일을 이어받아 하게 되었다. 선배 업무는 자잘한 뒤치다꺼리가 많은 회사 총 서무 업무였고, 인수인계를 하면서도 그 끝도없는 자잘함에 머쓱해하고 미안해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막 회사에 적응하며 한창 의욕이 넘칠 후배에게 그런 일들을 맡게 하는걸 안쓰러워했는데, 나름 업무 중에서 굵직하다고 생각하던 일을 나에게 소개하며 진지하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이 일은 이러저러하게 하면 되는데, 그래도 이 정도 일 하면 배우는것도 많고 나름 보람이 있을거야."

"엥? 이 일이요? 이거 완전 잡일이잖아요!"


아뿔싸. 나는 왜 말이 이렇게 튀어나갔을까. 그래도 이 일 하나로 더할나위없이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사실은 그 일이 신경쓸 것도 많고 절차도 복잡해서 하기 힘든 일이라고 하려고 한 거였는데 나도 모르게 '잡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간거였다. 선배 표정은 구겨질대로 구겨졌으나, 그 소심한 성격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냥 조용히 다음 업무를 소개해줬는데, 이제와서 아니 잡일이 아니라 말을 잘못한거라고 주워담아봤자 우스운 변명으로 보일게 뻔해서  나도 잠자코 인수인계만 받았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10년이 넘게 지났다. 하지만 그날 일은 바로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일그러진 선배 표정과 내 주책맞은 목소리 톤까지. 두고두고 후회가 되고 이렇게 문득문득 떠오르며 주구장창 그 선배에게 미안하지만 이제와서 뭐라고 사과할 길이 없어 그저 씁쓸할 뿐이다. (그 선배와는 여전히 잘 지낸다. 참 좋은사람이다.)


가족과도 그런 장면이 있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아직 상견례는 안했으나 서로의 부모님은 몇번씩 뵌 사이였고, 그 날도 무슨 연유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부모님과 교외로 바람쐬러 나가면서 남자친구를 불러 함께 갔다.

나들이를 잘 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어느 한정식집에 들어갔는데, 좌식인데다 식사가 밥상째로 들어오는 곳이라 식사가 나올때까진 아무것도 없는 방에 넷이서 덩그라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어야했다. 식전에 물부터 나왔는데, 물이랑 물컵 역시 올려놓을 상이 없으니 그냥 쟁반에 담긴 채로 덜렁 바닥에 놓고 있었다. 그 때 남자친구가 옷을 정리하려 일어나서 방 한쪽구석으로 걸어갔다왔고, 식사가 나와서 다들 맛있게 먹고 우린 우리집으로, 남자친구는 남자친구 집으로 돌아갔다.

평화로운 주말이었다 생각하며 집에서 쉬다가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식탁에 앉았는데, 아빠가 대뜸 말씀하시기를


"그 애는 초등학교를 옳게 못나왔나보더라. 버르장머리 없이 물통을 타넘고 걸어가던데."


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고 그런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아 우물쭈물 하고 앉아있는데 엄마가 반찬을 놓으러 왔다갔다 하시는 바람에 부산스러워져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냥 잠자코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간 여러번 인사드리면서 보아온 세월이 있었고,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거나 못배운 사람이 아니라는걸 아실텐데 저렇게 말씀하셔야 하나 싶은게 너무 서운했다. 안그래도 아빠가 말씀만 안하셨다뿐이지 평소 좀 못마땅해하시는 느낌이었는데, 저렇게 트집을 잡으시는구나 싶어 화가 계속 나고있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밥을 먹고있는데, 엄마가 여러가지 채소가 가득 들은 소쿠리를 식탁에 놓았고, 거기에는 그 즈음 우리가족이 모두 좋아한, '쌈추'라고 불리는 봄동 비슷하게 생긴 채소도 있었는데, 그 전날 먹다 남은거라 쌈추는 몇개 없고 다른종류의 쌈채소가 많았다. 그와중에 쌈추는 또 맛있어보이니 먹으려 하는데, 아빠가 집요하게 쌈추만 쏙쏙 먼저 집어드시는게 아닌가. 몇개 없는데 혼자 저렇게 싹쓸이하시면 나는 뭘 먹으라고. 안그래도 짜증이 나 있던 터라 한마디 했다.


"아빠. 아빠 혼자 쌈추 다 먹을거야? 그렇게 쌈추만 골라 드시면 어떡해!"

"......"


아빤 말없이 쌈추 외의 채소를 드시기 시작했고, 난 여전히 분노의 젓가락질을 하며 밥을 먹었다. 잘 참아보려했으나 남자친구를 그렇게 취급하는게 갈수록 화가 났고, 물통을 타넘는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긴 하겠지만 남자친구가 알고 일부러 그랬던것도 아닌데 그걸 가지고 그냥 지적만 하면 됐지 무슨 초등학교를 옳게 나왔니 마니 비하를 하나 싶어 점점 씩씩댈 정도로 화가 치밀어올라, 식사가 대충 끝나갈때쯤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니, 아빠 정말 너무한거 아냐??!!"

"나 그렇게 많이 안먹었어.....!"

"...????"


아빠는 내가 쌈추에 화가 난 줄 알고 식사시간 내내 잠자코 내 눈치를 살피셨던 모양이다. 그러다 또 버럭 하니 잽싸게 변명을 하신거고. 그게 아니라 왜 내 남친을 그렇게 말하냐 으앙 하며 울음보가 터졌고, 엄마가 아빠한테 빨리 사과하라고 다그쳐 아빠는 나에게 사과를 하시며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던 사건이지만, 세월이 무수히 흐른 지금도 그 날의 식탁이 떠오른다. 그 쌈추가 뭐라고, 식사하는 내내 딸의 굳은 표정을 살피며, 그걸 왜 먹었을까 후회하셨을 아빠가 안쓰럽고 애틋하다.


더 어릴때의 기억도 선명하다.

초딩 저학년쯤의 일인데, 언니와 나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외갓집에 종종 놀러가곤 했다. 특히 방학이면 우리끼리만 길게 다녀오는데, 외갓집에는 외할머니, 독신의 큰이모, 아직 미혼인 작은이모가 살고계셨다. 작은이모는 그 어린 조카들에게 우상같은 존재였는데, 이모의 직업이 유치원 교사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우리와 너무 잘 놀아주고 진짜 재미있게 해주는, 엄마보다 젊고 생각이 잘 통하는 이모! 그런 이모를 차지하려 언니와 나는 무던히도 경쟁했다.


그러나 항상 이모는 언니 차지였다. 이모도 나보다는 고학년인 언니와 더 대화가 잘 통했을테고, 아무래도 첫조카인 언니에게 더 애정이 많았을테지.

언니가 이모를 차지하고 이모 팔짱을 낀 채 앞서 걸어나가면, 뒤쳐져 시무룩해있는 내 손을 잡고 걷는건 외할머니였다.

"땡땡이는 이 할미 손 잡고 가자!"

라고 하시며 그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감싸쥐시는데, 어린맘에 그게 싫었다. 까맣고 울퉁불퉁한 할머니 손과, 할머니 냄새가. 젊고 재미있는 이모랑 깔깔 수다떨며 걷고싶지, 말이 하나도 안통하는 늙고 답답한 할머니는 싫었던거다.


슬그머니 손을 빼버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싫다고 말은 안했으나 심통난 표정, 손을 빼고 이모 뒤꽁무니를 향해 뛰어가는 내 모습을 보며 할머니는 다 아셨겠지. 그래도 어김없이 밤이 되면 내 손을 꼭 쥐고 주무셨고, 낮에 한 내 행동이 죄송해서 나도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잤다. 그래도 철이 꽤 들 때까지 난 그렇게 싫은티를 내고 살았던 것 같다. 막내손주가 그저 이뻤을 할머니였을텐데. 얼마나 서운하셨을지.


그런 할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 101세나 사셨으니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있다. 하지만 약 10년전부터 치매가 시작되셨고, 점점 나빠져 5,6년전쯤엔 나를 기억못하셨다. 그토록 예뻐하시던 작은손주를 몰라보심에 크게 충격받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3년 전쯤 한 면회를 마지막으로 더는 할머니를 뵐 수도 없게되었다. 거동도 어렵고 아무도 몰라보셔서 작은이모만 잠깐 뵈러 다녀오시곤 했고, 그마저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모든 면회가 중단되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코로나가 정점을 찍는 요즘, 숨을 거두셨다. 며칠전부터 의식이 없으시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가족 모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요양원 출입이 불가하고 가족들이 모여 임종을 지킬만한 병원으로의 이송도 어려웠다. 치매가 심하니까, 모여도 못알아보실테니까, 코로나때문에 모일수도 없으니까, 오래 사셨으니까. 그렇게 애써 위안삼으며 할머니의 죽음을 소식으로만 들었다.

 

그런데 101세나 사셨다고 죽음이 괜찮은 건 아니다. 손을 잡았던 온기가 아직까지도 생생한데, 그 손을 놔버리고 달려가던 기억이 생생한데, 잠들기 전 할머니 손을 꼭 쥐면 내 얼굴 한번 쓰다듬으시고 이불 당겨 덮어주시던 할머니가 지금 내 옆에 누워있는것처럼 생생한데.


그리고 아무리 치매라도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게 괜찮을 리 없다. 죽기 직전에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게 과학적으로 증명됐다고 하던데, 그럼 치매환자여도 죽기 전에는 기억이 활성화 되지 않을까. 아무리 치매여도 죽기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이 보고싶지 않을까. 아무리 연세가 많으셔도 자식 손주가 눈에 밟힐텐데. 숨이 끊어지셨나 확인하러 간간히 들여다보는 의료진을 마지막으로 보셨을 할머니가, 아니, 그마저도 눈 감는 순간에는 아무도 없어서 천장의 형광등만 보셨을 수도 있는 할머니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다음에 언젠가 할머니를 만나면, 손을 꼭 잡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싶다. 어렸을 때 그 행동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할머니 냄새도 좋고 따뜻한 손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그 장면을 사진처럼 찍어두고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 앞에서 울어버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