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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May 07. 2022

말 한마디의 힘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빡침을.

요 며칠 허리가 시큰하니 아픈걸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엄마껌딱지 17개월 둘째를 자주 안아주다보니 허리에 무리가 갔겠지 하고 스트레칭이나 몇번 하다가 그마저도 여유가 없어 관두고 그냥저냥 아픈 허리를 두들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 적응중인 둘째를 등원시키고 한시간 뒤에 찾으러 가기로 약속한 뒤 잠시 붕 뜬 시간을 떼우려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하며 책을 펼쳤는데, 앉아있는 내내 허리가 불편하여 자세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꿔도 아프기만했다. 도저히 책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산책이나 하자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리가 아픈 게 아닌가. 테이블을 붙잡고 비틀비틀 간신히 일어서서 구부정한 자세로 커피숍을 나와 조심조심 걷는데, 도저히 아이를 혼자 하원시킬 수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행히 그 날은 남편이 집에 있어서 남편에게 아이 하원을 부탁하고 나는 집을 향해 차 시동을 거는데,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 힘이 없어 두 손으로 잡고 풀고, 간신히 운전을 하는데 과속방지턱을 넘거나 우회전을 할때면 허리가 너무 아파 비명을 질러야했다.

갑자기 왜 이런거지, 커피숍 들어갈 때만해도 멀쩡했는데, 어디가 어떻게 망가진거지, 당장 오늘 저녁 부모님과 식사 예약이 되어있고 내일은 어린이날이라 숲에 놀러가기로했는데, 이렇게 못움직이면 안되는데...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집에 왔는데, 내 꼴을 본 남편이 당장 집 앞 한의원이 잘한다며 다녀오라고 마구 등을 떠밀었다. 알겠다고 화장실 갔다가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변기에 혼자 앉지도 못해 남편이 부축해주고, 볼일을 다 보고 나올때도 기어서 나오면서 점점 사태가 심각해짐을 느꼈다.


남편의 부축을 받아 집 앞 한의원에 갔다. 침 맞는게 두려워 생전 한의원에 가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아프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약 냄새가 훅 끼치는 한의원에 들어섰는데 손님은 나 혼자뿐인 한가한 곳이었다.

엄마 혹은 막내이모뻘 정도 되는 여자 원장이 날 훑어보더니 허리가 왜 그렇게 됐냐고, 요즘 무리한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딱히 그런건 없고 17개월짜리 아들을 키우는데 자주 안아주고 그러느라 힘들었다고 얘기했다. 원장은 허리 여기저기를 눌러보더니 근육이 완전 딱딱하게 뭉쳐버렸다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됐냐고, 위로 6세 형이 있다니 그럼 아들 둘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중이냐고, 안그래도 코로나에 집에만 있으면서 육아에 살림에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요즘은 날씨 좋아졌으니 애들 위해 야외활동 한다고 다녔을텐데 그것도 힘들었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난생 처음보는 그분을 붙잡고 오열할 뻔 했다.


어찌보면 애엄마한테 흔히 할 수 있는 레파토리였다. 코로나 시국에 누구나 이렇게 살고있을테니 내 또래의 애엄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특별한 감정이 담겨있는 다정한 말투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고, 고생했다는 그 말이 그동안 간신히 버텨온 내 자신을 다독이는 것 같아 큰 위로가 됐다. 솟구칠것같은 눈물을 간신히 삼키며 누워서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지난 몇 달 간은 정말 고생스러웠다. 친정 근처에 살아 종종 엄마의 도움을 받아왔지만 지난 1월 갑작스러운 아빠의 암 진단으로 온가족이 패닉에 빠졌다. 2월 중순경 수술을 받으시고 지금까지 항암치료를 하면서 모두의 정신은 아빠에게로 쏠려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아빠를 위해 모두 코로나에 걸리면 안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고, 코로나는 1월 중후반부터 급속도로 증가세에 올라 더더욱 긴장이 되었다. 그즈음부터 큰애 등원을 들쭉날쑥하다가 그마저도 아빠 수술을 코앞에 둔 설명절을 기점으로 아예 등원을 중단해버렸다. 그리고 수술 뒤에는 더더욱 서로 조심해야해서 아예 왕래를 끊었다. 코로나는 종잡을 수 없이 확산세였고 그렇게 두달 가량을 아이 둘과 집에 갇혀있었는데 심지어 남편도 너무 바빠서 애들이 눈을 뜰때부터 잠이 들때까지 육아와 살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아들 둘과 하루종일을 보내는 건 정말이지 고된 일이었다. 아침 챙겨먹이고 치우고 간식 내주고 돌아서서 장난감 정리와 청소를 마치면 작은애 낮잠시간. 자는 동안 큰애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하고, 둘째가 깨면 두 아이 점심을 먹이고 또 놀아주고 오후간식, 저녁식사, 산더미같은 설거지, 틈틈히 반찬하고 국 끓이고 목욕시키고... 에너자이저 6세 남아 하루종일 천방지축으로 구는거 통제하고 놀아주고 혼내고 야단치고 갓 돌지난 둘째 내려놓기만 하면 내 다리를 붙잡고 오열하는 바람에 한손으로 안고 집안일하고... 9시에 재우고 나면 빨래 널고 그제서야 한숨 돌리고 있으면 남편 귀가. 이 생활을 두달째 하고있을 무렵, 코로나에 걸렸다.


코로나에 걸린것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외식이나 외출은 하지도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있었는데, 딱 한번, 회사에 들려 장제용품을 받아다 외할머니 장례식장에 가져다 준 적이 있었다. 코로나 일일 확진자가 40만명을 넘어서는 중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극심한 코로나에 아빠도 걱정이니 장례를 최소화하기로 하고 나도 장제용품만 전달하고 바로 나오기로했는데, 하필이면 회사에서 장제용품을 건네주던 직원이 코로나 확진자였던 것이다. 서로 마스크를 썼고 접촉도 없이 약 5분가량 주차장에서 대화한 게 전부여서 사실 이 직원때문에 감염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시기에 마주친 사람이 그 직원뿐이어서  경로가 아니면 코로나는 내 몸 안에서 자연발생했다고 할 수밖에 없을것이다.

여튼 나를 시작으로 이틀 뒤 남편이, 그 이틀 뒤 큰애가, 그리고 내가 격리해제되는 날 막내가 줄줄이 코로나에 걸렸다. 정말 애석하고 원통했다. 그리 몸을 사렸건만, 그렇게 혼자서 용을 쓰며 애들을 집에서 보호했건만, 결국 내가 아이들에게 다 전파를 해버렸다는 사실이 미칠것같이 속이 상했다. 그래도 다행히 크게 아프지 않고 넘어갔다.


코로나도 다 걸리고 끝났겠다, 확산세도 점점 누그러들고 있어서 4월 초부터는 다시 큰애 등원을 재개했다. 그리고 3월부터 입소하였으나 감염병에 의한 출석인정으로 결석중이던 둘째 어린이집에 4월 말부터 등원을 시작했다. 아직 적응기간이라 잠시만 놀다 오는 수준이었지만 나름 나에게 30분, 1시간의 휴식이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4월부터는 한시름 놓긴 했지만 원장쌤 말처럼 날씨가 좋아져 야외활동을 많이 했고, 둘째 쪽쪽이를 끊으면서 그 짜증과 밤잠설침을 오롯이 받아내느라 고생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피로를 내 허리가 받아내다가 결국 한계에 도달해버린 것이었다. 맥을 짚으며 몸도 약한데 애들 챙기느라 밥도 잘 안먹었냐며, 엄마 먼저 든든히 먹고 애들을  먹이라는 말씀에 또 한번 울컥 하며 노곤노곤 잠이 왔다.

오랜만에 따뜻한 곳에서 찜질하며 침 맞고 긴장이 풀려서일까, 치료가 끝나고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허리가 한결 편해지며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게 아닌가. 역시 명의네 하고 감탄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허리도 마음도 치유된 기분으로.


이렇게 되기 며칠 전, 토요일이었다. 박사과정중인 남편이 그동안은 코로나로 온라인수업만 하다가 4월부터는 슬슬 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어 토요일마다 학교를 나가게 되었다. 원우회장을 맡는 바람에 각종 행사도 많았는데,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저녁때는 대학원 선후배들과 술자리까지 있는 날이었다. 슬슬 허리가 아파오던 나는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이 주말 독박육아를 하고 있었다. 두 형제와 다시 오롯이 복작거리며 청소는 내일 하자 하고 씻지도 않고 애들을 챙기고 있는데, 근처 사는 회사 선배가 아이들이 우리 막내를 보고싶어한다며 잠깐 들려도 되냐는 연락이 왔다. 아기를 아주 귀여워하는 그집 애들이 여러차례 오고싶어했는데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했던 터라, 일단 30분 뒤에 오라고 해놓고 바쁘게 온집안을 싹 청소했다. 아이들과 선배가 오고, 커피와 과일과 빵을 내놓고, 두어시간 놀다가 가길래 못다 끓인 국을 마저 끓이고 또 저녁을 먹이고 빨래를 하고 목욕을 시키고... 고된 저녁육아를 어찌저찌 마무리하고 재우고 한숨돌리며 맥주를 두어캔 먹고있는데 자정즈음 남편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어울리고 온 남편이 이런저런 얘기하는걸 들어주다가 조금 늦게 잤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뜨려는데 정말이지 너무 피곤해서 더 누워있고싶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항상 아이들을 먼저 챙긴건 나였는데, 오랜만에 하루쯤은 남편이 먼저 챙겨도 되겠지 싶어서 아이들을 좀 보라 하고 난 30분정도 더 누워있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먼저 챙긴다 함은 응당 아침밥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둔다는 의미지만, 남편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린다. 배고파서 짜증섞인 둘째의 울음이 거실에서 들려올때면 더이상 나는 쉬는게 쉬는게 아니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거실로 나와서 애들 밥을 챙겨주고있는데, 남편이 다가와서 한마디 한다.


"그런데, 자기는 왜 피곤해?"


니가 지금 제정신인가, 내 귀를 의심한다.

남편도 아침부터 학교가서 수업도 듣고, 술도 꽤 먹고 밤늦게 귀가했으니 힘든건 이해한다. 그렇지만 혼자 훌훌 나가서 수업듣고 술마시고 놀다왔으면서, 하루종일 양쪽에서 매달리는 아이 둘과 씨름하며 보낸 사람에게 그게 할 소린가.

무섭게 노려보는 내 눈빛을 읽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니 그냥.. 맥주 두캔밖에 안먹어놓고 왜 힘들어하냐는 뜻이었다고... 얼버무리더니 화장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래, 너는 말한마디로 내 분노를 용솟음치게하는 재주가 있지. 처음 만난 사람의 첫마디에 큰 위로를 받는게 신기할 것도 없다. 17년을 만난 사람에게 한결같이 한방에 분노 버튼을 누르는 놈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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