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엄마라 미안해
신기하게도 큰애한테는 나도 육아가 처음이라 서툰것 투성이다. 그래서 늘 짠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소풍이야 어린이집, 유치원때도 많이 겪어봤다. 도시락도 싸봤고 간식도 싸봤는데, 이상하게도 초등학교 입학하고 첫 소풍이라고 하니 왠지 나도 설레고 긴장되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소풍이야 선생님들이 철저하게 케어해주고 돌봐주는데, 학교에 들어갔으니 이제 어느정도는 혼자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걸 반증하듯이 준비물도
-1인용 돗자리(혼자 펴고 접으라는 뜻이다)
-비닐봉지 2개(쓰레기를 혼자 정리하고, 버스에서 멀미하면 봉지에 잘 토하라는 뜻일거라고 추측됨)
-음료수 금지(애기 아니라는 뜻. 원래 간식도 젤리 사탕 등 친구들과 나눠먹을 수 있는 것을 잔뜩 넣어줬었는데 초딩 되고부터는 왠지 안될 것 같아 아무것도 넣지 못했다)
-비가 올 경우 대비 작은 우산(애가 혼자 3단우산을 접었다 폈다 해야한다는 뜻이다)
-우비 금지(맞춰입은 반티가 잘 보이도록 하려는 의도인듯)
이런 준비물을 보고 있자니, 정말 이제 혼자 스스로 해야하는 어린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래서 혼자 잘 해낼 수 있도록 열심히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3월에 입학하고 두번째 주 즈음에 담임으로부터 '책가방 싸주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애기같기도 하고 혼자 싸라고 하면 세월아 네월아 할 게 뻔해서 내가 후루룩 싸주고, 등교할때도 내가 둘러메고 다녔는데, 당연히 초등학생은 혼자 연필도 깎고 아침독후활동 책도 챙기고 가방을 혼자 챙겨서 등교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큰애의 친구는 유치원 때 이미 혼자 가방도 정리하고 설거지통에 물통과 수저통도 넣고 스스로 샤워하고 옷도 입는다 했는데, 그 때 놀라고 말 게 아니라 우리애도 가르쳤어야 했던 것을.
그래서 소풍을 앞두고 맹연습에 돌입했다. 1인용 돗자리는 똑딱이 단추가 달려있어서 장바구니 가방처럼 잘 접어서 단추를 닫으면 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단추 위치를 맞추려면 나름 앞뒤를 구분해서 잘 접어야 했고, 열번쯤 연습하니 그건 어느정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음료수는 안된대. 물 마셔야해 알았지?"
"응, 알겠어."
"김밥은 어떤거 싸줄까?"
"소세지 들어있는 스마일 김밥이랑 문어 모양 소세지 해줘."
"문어모양 소세지는 잘 못해. 스마일 김밥만 해줄게. 간식은 젤리같은건 안될 것 같은데?"
"응 그냥 포도랑 오렌지 해줘."
문어모양 소세지는 한번도 안해봤지만, 밑을 갈라서 데치기만 하면 되겠지만 그마저도 귀찮아서 패스, 스마일 김밥은 사실 속으로 오예! 를 외쳤다. 채소 잔뜩 들어가는 김밥보다 훨씬 수월하니까. 그렇지만 그마저도 버거워서 당일날 아침에 친정엄마가 오셔서 도와주기로 했다.
아이가 원하는대로 포도랑 오렌지를 사고, 스마일 김밥을 위한 후랑크 소세지를 사고, 스마일 눈을 위한 검은깨(이건 검은깨를 사지 말고 검은깨가 박힌 과자를 사서 몇개 떼서 쓰는게 효율적이라는 언니의 말을 듣고 과자를 사뒀다.), 그리고 휴대용 물티슈와 건티슈도 준비물에 있길래 별도로 사서 넣고, 비닐봉지 2개도 고이 접어서 가방에 넣고, 소풍 전날부터 가방을 싸며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
소풍 당일 아침, 알람을 6시에 맞춰두고 일어나 김밥용 꼬들밥을 전기밥솥에 안치고, 샤워를 먼저 하러 들어갔다. 준비를 다 해뒀는데도 이상하게 뭔가 빼먹은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지만, 준비물을 하나씩 되뇌이며 빼먹은게 없는데 왜이러지? 하며 샴푸를 죽죽 짜는 순간, 김밥을 쌀 김을 사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오마이갓!!! 김이 없다니!!!
엄마가 벌써 출발하셨을까, 부랴부랴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디야?"
"이제 막 나왔어. 엘레베이터 타려고. 왜?"
"엄마!! 나 김이 없어!!!"
"뭐????!!!!! 집에 김밥용 김은 없고 그냥 김은 있는데, 일단 이거라도 가져갈게!"
어린이집 다닐 무렵 처음 김밥을 쌌을 때, 나는 세상에 김밥용 김이 따로 있는줄도 몰랐다. 그냥 집에 있는 김을 꺼내서, 맨김은 맛이 없으니 살짝 구워줘야지, 하고 심지어 구워서 김밥을 쌌더니 옆구리가 다 터지는거였다. 역시 김밥은 엄청 어렵군, 하고 있는데 언니가 넌 김밥용 김도 모르냐며 신세계를 안겨줬다.
김밥용 김은 좀 더 단단해서 옆구리가 거의 터지지 않고 칼로 썰 때도 찢겨나가거나 터지지 않았다. 김밥용 김을 안 뒤로는, 김밥을 쌀 때 김밥용 김이 없이 싼다는 걸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첫 소풍에 내가 김밥용 김을 안샀다니!!!
애타게 엄마를 기다려 일반 김을 받아서 힘겹게 쌌다. 절반은 터지고 찢겨나가는데 그 와중에 덜 이상한 것들만 고르고 골라 겨우 한 통을 채웠다. 과일도 예쁘게 담아 부랴부랴 가방을 싸서 소풍을 보냈다.
집에 돌아와 한숨 고르며 다른 엄마들의 프로필 사진을 열어보니, 형형색색의 도시락들 향연이었다. 유부초밥에 계란으로 곰돌이 얼굴, 토끼 얼굴을 만들고, 김밥 옆에 돌돌 말린 미니 샌드위치도 있고, 삼각김밥에 김펀치로(나도 김펀치 사둘걸...) 여러가지 표정을 데코하고, 당근을 꽃모양으로 잘라서 꾸미고.... 그놈의 문어모양 소세지라도 해줄걸. 뭐가 그리 귀찮다고 안해줬을까. 우리 아이의 휑한 도시락이 떠올라 자꾸 마음이 미어졌다.
과일도 보통 예쁘게들 담은게 아니었다. 예쁜 꼬지심에 줄줄 꽂혀있는 다른 아이들 도시락을 보다가 문득..... 젓가락도 포크도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마이갓!!!
분명히 젓가락을 넣어야지 해놓고는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아이가 도시락을 열고 집어먹을 도구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당황할텐데, 아니다 당황할 성격까진 아니고... 젓가락은 없어도 손가락은 있으니 알아서 먹겠지. 그나저나 손도 제대로 안씻고 먹을텐데...
가슴이 또다시 미어졌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어쩔 수 없지. 아이가 돌아오면 사과해야지.
오후에 아이가 소풍에서 돌아왔다. 너무 즐거웠다고 했고, 젓가락은 없었지만 손으로 먹었다고 했다.
도시락도 아주 맛있게 먹었고, 맛있게 싸줘서 고맙다고 했다.
도시락통을 열어보니 정말 텅 비어있었다. 남은걸 버린거냐고 물었더니, 남김없이 다 먹었댄다.
허전하고 비루한 이 도시락을 이토록 맛있게 먹어주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다니.
그러고보니 멀쩡한 모양새의 김밥이 별로 없어 양도 좀 적었을텐데, 싹싹 다 먹은거보니 부족하지는 않았을지... 젓가락도 없었지만 엄마를 전혀 원망하지도 않고, 돗자리도 3단우산도 잃어버린거 하나 없이 잘 챙겨왔다. 왠지 마음이 울컥 했다.
어느덧 훌쩍 커버린 아이에게, 다음번에는 더 예쁘고 좋은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물론 내년 소풍이 닥치면 또 귀찮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마음 같아선 문어모양 소세지도 하고, 계란 이불을 덮은 곰돌이도 만들고, 김펀치로 눈코입도 붙이고, 꽃모양 당근, 치즈로 마구 데코하고, 젓가락도 두개씩 넣을거다.
그렇게 첫 소풍은, 엄마에게만 서툴고 모자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