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모든건 경험해야 아는 것들
얼마 전, 큰애의 유치원때 친구가 생일 파티에 초대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유치원 친구들이 모인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고 파티 장소인 키즈카페로 향했다.
친구의 생일파티는 엄청나게 성대해서, 유치원 친구들 절반, 초등학교 친구들 절반 해서 총 참석인원이 10명이 넘는 거대한 행사였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정신없이 파티 준비를 하는 주인공 엄마를 자연스레 돕기 시작했고, 우연히도 유치원 친구들 엄마들만 죄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서로 오랜만에 만난 근황을 물으며 풍선을 불고 컵과 냅킨, 이름표 등을 세팅했다. 모두 다 다른 초등학교로 진학하는 바람에 우리도 서로 너무 반가웠던 차였다.
준비를 거의 다 마칠 즈음, 주인공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다른 초등학교 학부모들이라 다 초면이었다. 어색했지만 인사를 나누고 둥그렇게 모여앉아 각자 다른 초등학교들의 특징 등을 물으며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갔으나, 이윽고 자연스레 유치원 엄마들끼리, 초등학교 엄마들끼리 대화를 하게 되었다.
중간 중간 아이들을 챙기고, 점심 식사를 위해 햄버거 세트를 세팅해주고, 생일 케익 초를 불고 선물 증정식을 하고 사진을 찍고, 대충 먹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치우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등 지속적으로 손이 가는 상황이었는데, 묘하게도 유치원 엄마들만 너무 적극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초등학교 엄마들도 물론 이것저것 거들었지만, 부엌데기처럼 손발을 걷어붙이고 싹 해치우는건 유치원 엄마들이었다. 파티가 끝나갈 즈음 초등학교 엄마들은 아이들을 챙겨서 먼저 퇴장하고, 유치원 엄마들은 남은 풍선과 판넬, 쓰레기 분리수거와 테이블 원위치 세팅까지 마무리하고 나서야 파티장을 나섰다.
생각해보면 같이 초대받아 간 입장인데 그렇게 들러리처럼 허드렛일을 할 것 까지는 없을 거였다. 손님으로서 적당히 함께 치우고 정리하고 먼저 빠져나가줘야 뒷정리가 수월할 수도 있을 건데, 끝까지 남아서 테이프 자국까지 꼼꼼하게 지우고 쓰레기 정리까지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들만 남아서 뒷정리를 도맡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유치원 엄마들의 특징이 그렇다. 우리 애들은 병설유치원을 나왔는데, 모두가 그런건 당연히 아니지만, 병설유치원을 보내는 학부모들은 기본적으로 유치원에 대한 기대가 없다. 여기서 기대란, 내가 어떤 가격을 지불해서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싶은 마음을 말한다.
병설유치원은 무상이라, 내가 내는 돈이 하나도 없다. 수업료, 급식, 방과후, 간식, 특별활동비 등등 모두 나라의 세금으로 운영되지, 학부모에게서 걷어가는 돈은 큰애가 다니는 3년동안 수익자부담 원칙 중 차액이 발생했다며 8천원 정도 납부한게 전부였다. 내는 돈이 없으니 나의 지출에 상응하는 어떤 관심이나 케어를 요구할 이유 자체가 없다.
그렇다고 무료라서 병설유치원을 택한건 아니었다.(물론 훌륭한 장점이어서 고려한거겠지만!)
공립 유치원 교사의 우수성과, 5~7세 연령에 필요한 누리과정을 가장 충실히 이행해 줄 것이라는 기대, 원치않는 방과후 특별활동비를 내고 싶지 않다는 점 등 때문에 병설유치원을 선택하였고, 정말이지 유치원을 다니는 3년 내내 아이들은 인성 확립과 자유 놀이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아이들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한테 혼이 나서 울면서 들어와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팔을 걷고 울면서 비누로 손을 씻었다. 벗은 외투는 팔과 모자를 안쪽으로 착착 접어 보관함에(유치원엔 있으나 집에는 있을리 만무하니 어디 구석이나 아니면 손이 닿는 옷장 수납칸에) 넣었다. 다 먹은 그릇은 스스로 정리하고, 혼자 신을 수 없는 신발은 아예 신지 않는다(유치원에서 스스로 해야만 하므로). 젓가락질을 우수하게 해내서 학교에 입학하면 티가 날 정도로 잘하고, 자유놀이 시간에 하도 접어서 그런지 종이접기를 아주 잘한다. 툭 치기만 해도 미안해-괜찮아 가 세트로 로봇처럼 일단 튀어나온다(진심인지는 모르겠다).
대신, 한글이나 영어 등 교육은 온전히 가정의 몫이다. 유치원에서 학습을 하지 않으니, 학교 입학 전에 익히고 싶다면 따로 가르치던가 사교육의 힘을 빌려야 한다. 퍼즐, 코딩, AI교육, 음악, 미술 등 따로 학원비를 내서 다니기는 조금 아까운데 사립유치원에서는 사교육비보다 적은 금액으로 다채롭게 체험하게 해 주니 그런 것들은 조금 부럽다.
교사의 경우, 기본적으로 우수성이 보장되어있고, 직업 안정성이 주는 여유로움이 장점일 거라 생각했다. 병설유치원 교사는 학교 선생님처럼 딱딱할 거라는 편견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아이들에게 매우 다정하고 사랑을 주신다. 대신, 위에 말한 것 처럼 아이들의 자조능력 향상이 최우선이므로 쉽게 도움을 주지 않고 스스로 끝까지 해내도록 독려하시니, 본인의 아이를 아직 핏덩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에게는 조금 냉정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지, 친절한 육아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님을 교사도 부모도 모두 아주 잘 알고있어서, 교사가 조금 무뚝뚝해보이거나 부모에게 다정하게 하루 일과를 들려주지 않는다 해도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옷에 뭐가 묻거나 구멍이 나도 그런가보다, 넘어져서 상처가 있어도 큰 문제가 아닌 이상 그런가보다, 아이가 친구와 다퉜다거나 선생님한테 혼났다거나 그런 얘길 해도 심각하지 않으면 유치원에 물어보지 않는다. 아이의 인성에 심각한 타격이 있는 일이 아닌 이상, 문제제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부모들이 전반적으로 순하고 털털하다. 작은 일에 마음상하면 병설유치원에 보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성격은 애초에 유입되지 않거나 중도퇴소한다. 그냥 좋은게 좋은거고 좀 손해봐도 괜찮고 궂은일을 자처하는게 마음 편한 사람들이 끝까지 병설유치원에 남아있는 편이다.(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기본적인 성격+학습된 자세 랄까. 나도 원래는 꽤 이기적이고 1도 손해보지 않으려 악착같이 살던 사람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그런것들이 무용하게 느껴졌고, 유치원을 보내는 동안 점점 더 그런 성향이 사라지게 되었다. 역시 병설유치원은 아이 뿐만 아니라 부모의 인성교육도 시켜주는가보다.(돌려까는거 아님!) 그래서 그렇게 남의 행사에서도 손털고 나가지 못해 쓰레기라도 주웠나보다.(물론 그 초등학교 아이들이 어느 유치원을 나왔는지는 모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둘째까지도 병설유치원에 보낸다. 나도 이렇게 점점 더 유순해져서 인성 좋은 사람이 되고싶으니까. 인생에 큰 욕심은 없는데 '좋은 사람' 이 되고싶다는 욕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노력 없이는 될 수 없는 그 목표를 위해 오늘도 내일도 학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