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장과 같이 펑펑 울었다
TV가 없어서 유행하는 드라마를 제때 보지 못하는 편이라,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울 자가 김부장, 김부장 하는데 한참을 지나서 겨우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소설로 읽었던 터라 별로 관심이 없었고, 류승룡이 주연이라 하니 불보듯 뻔한거 아니겠는가. 능글능글한 꼰대 김부장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겠지.
초반은 그렇고 그런 직장 내 전쟁터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생 이후 무수히 많이 쏟아져나온 직장물(?) 중 하나 아닌가. 임원 승진을 위한 처절한 혈투, 위아래로 치이는 부장의 현실, 그 와중에 집과 차와 명품가방으로 과시하는 꼰대 스토리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나마 능청스러운 류승룡의 연기만이 볼거리를 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승진에서 탈락해서 명퇴 일로를 걷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50대의 부장들이 직면한 현실이라 PTSD 가 와서 하차했다는 기사들이 뜰 만 했다. 이후 무리한 부동산 투자로 인한 몰락, 아니 추락은 이야기의 전개를 과도하게 끌고가는 것 아닌가 하는 거부감이 들었다. 게다가, 같이 사기당한 윗층 정신과 의사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내담하는 장면이라니.
그런데, 거기서부터 이 드라마의 깊이의 차원이 달라졌다. 김부장은 왜 그렇게까지 임원 승진에 목을 매고, 부동산 사기를 당할 만큼 절박하게 성공을 갈망했을까.
어릴 때 부터 형의 그늘에서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채 성장한, 그래서 번듯한 집을 사고 대기업 임원을 다는 것이 자존심의 전부였던 인생. 명퇴에 내몰리며 그 자존심이 구겨지자, 보란듯이 성공한 건물주로 다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사기를 당할때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욕심을 부린다.
그렇게 다 잃은 채 갈 곳이 없어 찾아간 형에게, 어릴 적 엄마가 형만 편애했던 거 아냐, 엄마가 형만 바나나를 더 주고 나는 적게 줬는데, 그것마저도 왜 빼앗아먹었냐, 왜 그래놓고 사과 한마디 안했냐 하소연한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형을 보며, 그런 상처받았던 기억에 자기만 갇혀있었다는 걸 깨닫고 허탈하게 돌아선다.
그러나 형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장남으로서 부모의 기대와 지원을 부담스럽게 받으며, 똘똘한 동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고, 동생이 상처받고 악착같이 살아가는 걸 알지만 그렇게 동생을 악바리로 만든 결과인 자신의 삶이 그리 번듯하지 못해서 뭐라고 위로를 건넬 처지도 못된다. 형의 마음은 또 얼마나 복잡미묘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날 형에게 사과를 받았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묻는 김부장에게, 의사는 말한다. 인생은 알 수 없는거라고. 그런 과거가 추진력이 되어 대기업 김부장까지 번듯하게 살아온 것이고, 또 그 추진력때문에 부동산 사기를 당한거라고.
여기까지 깨닫고, 김부장은 그 잘난 자존심과 이별한다. 그 굴레 속에서 주변은 물론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며 앞만 보고 내달린 자신을 위로하고, 앞으로의 행복을 다짐한다.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공을 처연하게 만들어버리는 이적의 OST가 깔리며, 김부장과 함께 펑펑 울었다.
나 또한 언니 밑에서 인정욕구를 채우지 못하며 성장했다. 번듯하게 성공하고 싶었고, 누구보다도 더 가져야했다.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하고 끝없이 불행했다. 지금 이순간의 행복 같은건 잘 느끼지도 못하고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그저 나에게 모질게 대하며 살아오곤 했다. 멈추면 끝없이 자책하고, 방황하고 있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여겼다. 그런 것들이 모여 스스로 상처를 냈다.
가끔 김부장처럼 생각했었다. 엄마가 나를 좀 인정해줬더라면, 언니가 나를 존중해줬더라면, 나 자체를 사랑한다고 누가 말좀 해줬더라면, 달라졌을까.
윗층 의사 말대로 인생은 모르는거다. 그 순간들이 나에게 독이 됐을지, 자산이 되었을지 아무도 모르니 누굴 탓할것도, 과거를 후회할 것도 없다.
그저 김부장처럼 과거의 나를 다독이고, 지금의 나를 인정하며, 미래의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거다. 이런 글들을 수없이 읽어왔지만 버려지지 않던 그 자존심이, 김부장의 처연한 얼굴과 함께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앞으로도 삶은 녹록치 않겠지만, 그 때 마다 김부장의 얼굴과 축 처진 어깨가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