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배려심

협동하는 마음을 배우는 중

by wisdom

얼마 전 아이 학교에서 우리동네 탐구 같은 주제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어떤 가게가 있는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등등을 알아보는 시간이었는데, 그 중에서 직업을 체험해보는 활동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직업들 중에 각자 하나씩 선택해서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형태였는데, 해당 직업을 드러낼 수 있는 소품이나 의상 등을 준비해야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동네라고 다른 동네와 달리 특별히 어떤 직업군이 모여있는 지역도 아니니, 아이들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직업들을 골랐는데, 친구와 선택한 직업이 겹치면 같이 발표를 해도 좋다는 것 같았다.


아이는 학교 활동에 특별히 적극적인 타입이 아니므로, 이번에도 어떤 역할을 고를지 별로 고민하지 않는 모습이었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우루루 몰려서 나도 나도 하면서 그냥 골랐을 것 같은 느낌으로, 택배기사를 골라왔다. 20명 있는 반에서 무려 4명이나 택배기사를 한다고 했다 하니, 별 관심 없다가 친구들이 한다니까 저도 손을 든 모양이다.


아이에게 그럼 준비물은 뭐냐, 물었더니 4명이 다같이 파란색 티를 맞춰 입기로 했고 자기는 택배 박스를 준비하기로 했으니 나더러 택배박스를 좀 모아달라고 했다. 택배박스야 많지! 아이들이 들기 적당한 사이즈로 네 개를 골라둬야겠다 싶어 재활용 정리해둔 것도 다시 뒤져보고 새로 받은 택배들도 상자를 모아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발표를 이틀 정도 앞뒀을까, 준비물이 바뀌었다면서 자기는 파란색 마스크 4개를 준비해가야 한다고 했다. 가져가기에는 더 간단해졌지만 집에 파란색 마스크가 없어서 부랴부랴 빠른 배송으로 마스크를 주문했다. 그리고 엄마들 카톡방 여기저기서 혹시 앞치마 있는 사람(요리사), 수갑 있는 사람(경찰) 등등 이것 저것 준비물들을 찾느라 분주했다. 마침 둘째가 어린이집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되서 유아용 앞치마와 머리수건이 있던 터라 도와주고, 누구는 큰애 장난감수갑이 있다 했고, 누구는 군인을 맡았으니 장난감 총이라도 줘야하나 하면서 엄마들도 즐겁게 준비물을 마련했다. 그 와중에 쇼핑몰을 운영하는 한 엄마가 택배기사팀을 위해 진짜 송장을 뽑아줄 수 있는데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


"우와! 떙땡아! 별이 엄마가 송장 뽑아준대! 이거 박스에 붙일까?"

"송장이 뭐야?"

"아, 택배 박스에 주소랑 이름을 써서 붙이는 스티커 있잖아. 그게 송장이야. 실제로 너희들 이름까지 넣어서 뽑아줄 수 있대! 멋지지?"

"우와 진짜? 그런데 그거 준비한 친구 있어."

"아 그래? 그런데 걔는 송장을 어떻게 준비해온대?"

"포스트잇으로 할거래."

"에이, 포스트잇보다 진짜 송장이 훨씬 더 멋지지! 별이 엄마한테 네 장 뽑아달라고 하자! 이거로 가져가!"


진짜 송장까지 멋들어지게 딱 붙어있고, 거기다 아이들 실명까지 인쇄되어있으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직업 체험을 어설프게 장난감 소품을 가져다 하는 팀들보다 훨씬 더 퀄리티 있고 리얼리티한 발표가 될 듯 싶었다.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던 아이는 의외로 곰곰히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아니, 안가져갈래."

"왜? 진짜 송장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데."

"그럼 송장 준비해 온 친구가 자기 준비물이 쓸모없어지니까 슬퍼지잖아."


아....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각자 나름 자기의 역할을 준비해 오는건데, 더 멋진 소품이 있다며 순식간에 내 것이 버려진다면 정말 슬플 것 같았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나는 혼자 열심히 고민해보고 준비해둔 기획안 같은것이 순식간에 묵살되는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 준비하라고 말이나 하지 말던가, 지시를 받은 뒤부터 나름 공을 들였던 내 시간들과 생각들이 하염없이 허무해지고 불쌍해지는 그 순간들. 수없이 겪어봤던 그 기분들을 어린 아이에게 벌써부터 안겨줄 수는 없다. 아이에게 그래도 아쉬울까봐 몇번 더 물어봤으나 대답은 갈수록 단호해졌다. 친구를 슬프게 할 수 없어. 라고.


나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을 하는 아이. 어쩌면 직업 체험은 단순히 직업을 알아보는 활동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협동과 노력을 통해 더 많은걸 배우게 하는 수업은 아니었을까.(갑분 서프라이즈 말투로 끝맺음)


아이의 배려심이 그 어떤 학업성취도보다 더 드높아지길 학교에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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