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도 갈등도 스스로 풀어나가는 것
아이는 어릴때부터 친구들과 북적북적하게 같이 놀고 어울리는걸 좋아하는 성향이었다.
어린이집, 유치원 다닐때는 하원 후 같은반 친구들과 자연스레 공동육아겸 어울려 놀기 좋았으나,
초등학생이 되자 방과후의 스케줄들이 각자 달라서 그게 쉽지 않았다.
아이의 친구를 어디까지 엄마가 만들어줘야 하는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릴때는 그런게 통할 순 있어도 초등학생쯤 되면 엄마가 나서서 친구를 만들어준다 한들 자기들끼리 성향이 맞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가 학교생활에 적응이 좀 어렵거나, 낯설어서 두려워하거나 하면 친구를 만드는데 좀 도와줘야하고, 아닌 경우는 그냥 두면 된다고들 했다. 우리 애는 반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사귀고 학교도 아주 즐겁게 잘 다니는 것 같아서 그냥 두면 되겠다 싶었다.
타지역에서 어린이집, 유치원을 나오는 바람에 학교에 아는 사람이 너무 없기도 했다. 주로 비슷한 지역에서 줄줄이 다니면서 어릴때 친구들과 자연스레 학교에 입학하는 루트를 나 빼고 모두들 밟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교시간에 교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으면 나만 혼자 우두커니 서 있고, 다른 엄마들은 서로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떨고 남의 아이들과도 반갑게 인사하고 아이들 가방을 짊어지고 우루루 놀이터로 향하는 모습을 보자니, 친구들과 북적이며 노는걸 좋아하는 아이에게 좀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르는 엄마들한테 다가가 친밀하게 굴기도 성격상 어려웠다. 뭔가 접점이라도 있어야 대화라도 할텐데, 같은 1학년 학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럼없이 친해지기는 아줌마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영어학원을 시작해야겠다 싶어 근처 유명 학군지의 영어학원에 들어갔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그 학원을 궁금해하는 엄마들이 있었고, 오며가며 안면만 있던 사이였지만 학원 정보를 공유해주고, 친구 소개로 들어가면 상호 할인이 되므로 연락처도 주고받으며 가까워졌다.
그러고보니 엄마들 인상도 좋고, 아이들도 맑고 귀여웠다. 늘 지켜보면서 좋은사람들 같으나 딱히 접점이 없으니 알고 지내지 못했던 사이였는데, 영어학원이라는 공통점이 생기자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엄마들은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더 친절했고, 아이들은 성별이 달랐음에도 스스럼없이 가까워졌다. 학교-학원 동선이 같아지자 같이 놀이터도 가고 간식도 먹고 서로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어릴때 즐겨봤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에서 친구 범이가 하도 자기집처럼 들락거려서 '하숙범'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친구들과 그런 친밀한 관계를 허락하지 않았던 엄마 밑에서 자란 나로서는 그게 꽤 부러웠고, 아이에게 친구들이 생긴다면 하숙범같이 친밀하게 지내게 해야겠다는 다짐이 있었던 나는, 이런 친구 관계가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함께라면 뭐든지 오케이했다.
이러한 긴 내력을 이유로, 나의 판단력이 흐려졌다. 어느 순간 그 친구들이 우리 아이를 툭툭 치고 가방을 잡아끄는 등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주치면 야 김땡땡! 하면서 옷이나 가방을 확 잡아채서 불러세운다던가, 주먹으로 팔이나 등을 툭툭 때리거나 발로 차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 장면들을 지켜봤지만, 그 감정을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다. 나도 사실 어릴때 친한 남자아이들에게 이런식으로 대한 적이 있었다. 친해지고 편한 사이가 되는 순간, 여자아이들 중에는 남자아이를 약간 하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친구로서 좋아하는 감정이 있으면서도 남자아이들은 대체로 좀 어수룩하니까 만만하게도 느껴지고, 남자아이라 자기보다 힘이 강하지만 여자인 나에게 함부로 손대지 못할거라는 것도 수많은 교육을 통해 잘 알고있는 상태다.
사실 그렇다. 남녀를 떠나서 폭력은 안되지만, 여자아이들의 행동은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더 폭넓게 허용된다. 1학년 첫 공개수업때 담임선생님이 한 말이 꽤 충격적이었는데, 남자아이들 소변볼 때 바지를 다 내리지 않고 앞부분만 살짝 내려서 볼일을 볼 수 있도록 지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아직 서툰 나이니까 혹시라도 옷을 적실까봐 바지를 확실히 내리고(대신 땅에 끌리지 않도록) 소변을 보라고 신신당부해왔던 나로서는, 그런것도 훈육을 해야하는건가 싶었는데, 남자화장실 문이 열려있는 상태에서 소변을 보는 남자아이들의 엉덩이를 깐 뒷모습을 지나가던 여자아이들이 보게 되어 성희롱 관련 학폭으로 이어진 사례가 있었다는거다. 그래서 아, 엉덩이를 보고 여자아이들이 놀려서 남자아이가 성희롱으로 신고했다는 뜻이구나 했는데, 완전히 반대였다. 남자아이들이 엉덩이를 노출해서 그걸 본 여자아이들이 성적인 피해를 입어서 여자아이들 쪽에서 성희롱문제를 제기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구체적 개별적 사안에서 더 디테일한 무언가가 있었겠지만, 여하튼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것이 성희롱 문제로 이어질 것 같으면, 남자화장실 문을 자동 닫힘문으로 만들던가, 소변기에도 개별문을 달아주던가, 소변기의 위치를 바꿔서 복도에서 엉덩이가 보이지 않게 하던가, 여튼 여자아이들이 지나다니면서 보이지 않도록 해야지, 그저 소변을 볼 뿐인 남자아이들의 바지춤 내리는 길이까지 단속해야하는 문제인가 싶었다. 그러나 별 수 있는가. 오줌을 눌 때 바지를 살짝 앞에만 내려야해. 누군가에게 네 엉덩이가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해. 절대 사람은 때리면 안돼. 특히 여자아이들에게는 절대절대 힘을 써서는 안되고, 친밀한 표현이어도 팔이나 손을 잡는것도 안돼. 다른 사람의 몸에 손을 대면 안돼. 이런걸 무한반복으로 가르쳤다.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남자아이들을 때리면 안된다. 그걸 알면서도, 여자와 남자의 힘의 불균형, 친밀함의 표현일 거라는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추측(관심없으면 거들떠도 안보는건 사실이다.), 평소 행실을 잘 알고있으니 나쁜 아이들이 아니라는 확신, 좋은 부모들이니 잘 바로잡아 줄거라는 믿음, 친해지고 싶었던 친구들이니 살짝 안본눈까지 결합되어, 그런 행동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우리 애도 딱히 아파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실실 웃으면서 끌려다니길래, 짜식 그냥 재밌나보다, 하고 넘겼다. 모르는 아이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친구 때리는거 아니야. 라고 말하며 내 아이를 보호했겠지만.
그러다 얼마 후, 사건이 터졌다. 평소처럼 친구를 데려와 집에서 노는데, 아이의 행동이 어쩐지 어색한거다. 말수도 적고 친구의 요청에 대답도 안하고 잘 놀지도 않고 자꾸 혼자 있으려하고. 친구도 조금 머쓱해하는 것 같아서 적당히 마무리하고 돌려보낸 뒤 아이에게 물었다.
"땡땡아. 친구 초대해놓고 친구 무안하게 왜 그랬어?"
"그냥. 같이 놀기 싫었어."
"무슨 일 있었지?"
"........"
아이는 우물쭈물 하다가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다.
영어학원에서 한국어로 말하면 안되는 시간이 있는데, 그 친구가 한국어로 말을 해서 아이가 선생님한테 바로 일렀더니, 그 애가 돌아오는 셔틀버스에서 "너 맞을래?" 하면서 주먹을 치켜올렸다는거다. 주변 친구들이 다 보고있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이 아이에게 꽤나 굴욕적이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그랬구나. 잘못된 행동이긴 하네. 그런데 너도 친구 실수를 너무 바로 일러버려서 친구가 화가 좀 나지 않았을까?"
"그래도 한국어 금지인데 한국어를 했으니 선생님한테 이른거지!"(이런 류에서 철저한 성격이다.)
"그래, 어쨌거나 그 친구도 기분이 나빴을거라는거야. 그런데 너가 그렇게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친구를 왜 집에 데려왔어? 초대해놓고 친구 무안하게 행동하는건 너도 예의에 어긋난거야."
"난 안데려오고 싶었는데 걔가 쫓아온거야. 난 걔랑 안놀고싶어. 날 맨날 때린단말이야."
"어떻게 때리는데?"
"막 가방 잡아당기고 밀치고 팔 때리고, 학원에서도 한번 밀쳐서 나 넘어져서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적도 있어. 발로 차서 여기 뼈 맞아서 아픈적도 있었단말야."
내가 봤던것보다 더 강도가 셌던 날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엄마들 앞에서 자제한다고 한 행동들이었겠지. 본인 부모들이 있을때는 거의 안했고, 나만 있을때는 살살 튀어나왔는데, 자기들끼리 있을때는 더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
"엄마도 본 적 있잖아?"
그렇다. 아이는 내가 봤다는 걸 알고있었던거다. 알면서도 개입 안하는 엄마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다.
"맞아. 엄마도 봤는데 그렇게 심한 줄은 몰랐지. 엄마는 그냥 너희들이 친해져서 그런다고 생각했어. 너도 그냥 웃고있길래 힘든 줄 몰랐어. 엄마가 미안해. 그런데 그렇게 괴로웠으면 친구한테 그만하라고 말을 했어야지 왜 안했어?"
"했어! 계속 말했어!"
"그런데 뭐래?"
"'어쩌라고!' 라고만 해. 걔들은 절대 안바뀔 애들이야!"
아이는 급기야는 울먹울먹하면서 그간의 억울함들을 토로했다. 어쨌거나 짚고 넘어가거나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 온거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친구들이랑 놀지 않는게 좋겠어?"
"뭐 그런건 아니야." (그건 또 싫은 모양이다.)
"그럼 어떻게 할래? 엄마가 엄마들 통해서 말해줘? 아님 네가 해결해볼래?"
"내가 할래. 난 복수하고 말거야!"
"복수라니? 같이 때리는건 절대로 안돼."
"그래도 한번은 꼭 복수할거야!"
"그래. 그럼 어쨌거나 네가 해결하기 전까지는 친구들 집에 부르지 말자. 또 그렇게 무안하게 만들거면 초대할 수 없어."
"알겠어!"
복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일이 생기기 전에 일단 그 아이들의 행동부터 자제시켜야 할 것 같아 아이들 부모들에게 말했다. 모두가 아이들이 훨씬 친해져서 생긴 현상이라는걸 공감했지만 여튼 거친 행동은 주의시켜야한다는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직 각자의 아이들에게 훈육을 하기도 전인데, 또 학원버스에서 내려서 시끌시끌하면서 같이 놀자는 분위기를 형성해 가길래 아이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땡땡아. 네가 해결하기 전까지는 집에서 모여서 놀지 않기로했잖아."
"해결했는데?"
"뭐...? 어떻게 해결했어? 진짜 복수를 했어?"
"응!"
복수를 했다기에는 아이들 사이가 너무나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도대체 뭘 한걸까?
"복수를 어떻게 했는데?"
"돌아오는 학원 차 안에서 '야! 너 나한테 사과해!' 라고 했어."
"그게 복수야?"
"응!"
"그게 왜 복수야...?"
"다른 친구들이 있는 데에서 사과를 시켰으니까 복수지!"
그렇다. 아이는 여럿이 있는데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그 애에게도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인 어떤 난처함을 되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사과를 하라고 하는게 그렇게 복수라고 할 만큼 난처한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그 애가 뭐라고 했어?"
"'오늘만 사과해준다!' 라고 했어. 난 이제 사과 받았으니까 오늘 같이 놀아도 돼~"
아이는 후련해보였다. 나름의 방법으로 복수를 했고, 원하는 답도 받았다. 그러니 이제 거리낌없이 놀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각자의 엄마들도 아이들에게 잘 말해준 모양인지, 그 이후로 단 한번도 서로의 몸에 손을 대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정말이지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여전히 아주아주 친한 친구 사이로 매일 즐겁게 다닌다. 이제 2학년이라고, 제법 친구 관계에서의 갈등도, 그리고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도 찾아가는 모습이 기특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