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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May 06. 2020

조모임의 신

5월의 창작 주제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한 때 조모임(혹은, 팀플)에 관한 이야기가 웹툰이나 드라마의 인기 소재였던 적이 있었다. 대학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실제로 한 번쯤 겪어볼 일이기도 하고, 또 공동의 목표를 두고 타인과의 갈등을 조율해나간다는 플롯은 여러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기 쉬우니 여러 캠퍼스물의 단골 소재가 되었던 듯하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아예 조모임 진상 캐릭터들을 유형 별로 나눠서 소개하는 게시물들도 정말 많았다.    

 

 고백하자면 그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조금 지쳤다. 원래는 내가 바로 조모임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학과 수업에 꽤나 열정적인 편이었고, 지지부진한 조모임이 있더라도 내가 키를 잡고 평가의 바다를 헤쳐 나갔었다. 하지만 분명 그 과정에서 나를 독단적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기회를 주지 않은 탓에 더 할 수 있는데 그냥 손 놓게 된 조원들도 분명 있었다. 결국 누가 누구를 대리해 완벽히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다시 본 ‘조모임 서사’들에는 곳곳에 혐오가 배어 있었다. 왜 조모임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예쁜 여자 조원은 하필 남자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모임을 펑크 낼까. 왜 화장을 수정하는 모습이 그렇게 밉살스럽게 그려질까. 왜 목소리가 새되고 안경을 쓴 캐릭터는 동시에 의지박약이기까지 한 것일까. 표현이야 서툴지만 품고 있는 생각만큼은 단단한 캐릭터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일까.  

   

 친한 친구들끼리 같은 과목을 수강하는 여자 후배, 소심한 아싸, 외국인 학생, 만년취준생, 비판적 의견을 잘 내놓는 무뚝뚝한 여자 등등. 이들은 유형이 정립될 정도로 명확하게 캐릭터가 구축되어 여러 사람의 ‘공분’을 산다. 물론, 실제로 이런 분류에 일정 정도 포함되는 사람들을 만나 고생을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중국인 학생 분과 조모임을 할 때 그 분이 읽기 자료를 읽는 것 자체에 서툴러서 함께 작업하기 어려운 경험이 있었다. 동시에 이 분은 우리가 알기 어려운 중국의 사례를 들며 발표에 살을 더해주기도 하셨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실제의 사례들을 들며 진실공방을 펼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이야기다. 어떤 부분을 선택해서 배치하고,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는가.      


 나는 우선 많은 종류의 게시물들이 조모임이 망하는 현상을 공산주의가 실패한 사례와 연관시켜서 말하는 데 놀랐다. 여기서 망했다는 것은 결국 열심히 한 사람의 학점까지 말아먹었다는 소리일 것이다.(물론, 배움의 성과로 오직 성적만을 살피는 논의는 얄팍하다. 하지만 여기선 마치 공산주의가 당면했던 총생산량 감소의 문제처럼 조원들의 성적이 하향평준화될 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논의에 따라 이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한 교실을 기준으로 볼 때 과연 조모임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하는 학점의 총합이 감소했나? D를 받는 팀이 있으면 분명 A를 받는 팀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대부분의 수업이 상대평가이기 때문이다.      


 무고한 소수가 혐의가 있는 다수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점에서 여전히 좀 공산주의스럽지 않느냐고 반론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 어떤 게시물에선 팔레토의 법칙까지 언급했다. '상위 20퍼센트가 대부분의 일을 한다.' 나는 모두가 다 초보 학습자인 와중에 왜 상하위를 구분해야 하는 것인지 우선 잘 모르겠다. 게다가 연좌제의 부당함은 꼭 공산주의만 안고 있는 문제도 아니다. 나는 최근에 회사가 아직 성장 중이라는 이유로 직속 상사가 구두로 숱하게 약속해왔던 원고료를 받지 못했다. 회사의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좀 덜 떨어졌던 것 외에는) 무고한 내가 피해를 입은 것이다. 


 다소 얘기가 샜는데, 나는 조모임의 경우도 그게 다 점수 제도라는 맥락 안에서 이뤄지는 단체활동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를 통해 상대평가나 경쟁의 냉혹함에 대해 실감했다는 반응이 더 수긍할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글들은 조모임이 주는 물리적 스트레스를 (농담의 형태라고는 할지라도) 반공의 다짐과 연결시키는 것일까? 이런 관점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취준생이 무슨 ‘성격’인 양 캐릭터화 되는 것도 잘 납득이 안 갔다. 나도 물론 누군가 취직 준비를 해야 해서 조별 과제에 이름만 올려놓고 떳떳하게 불참하는 경우가 답답했다.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온갖 상황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취업 공부는 전공 공부와 따로 진행해야 하며, 취업 공부가 우선돼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문성을 살리는 직종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그 대우도 매우 열악하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의 행동 안에도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선 사회 전반의 풍조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두고 어찌 고유능력이 ‘만년취준’인 빌런 한 명만을 탓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 발견한 특징은 조모임 서사 속엔 오직 악한과 피해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언뜻 생각해도 점수나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 성공하는 조모임 얘기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치인트>의 홍설 역시 역할을 분담하고 업무를 도맡아 확인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좋은 평가를 받는데 실패하고 만다. 사실 자료조사자, 발표자, 분석자를 나누고 각자 역할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 것에는 딱히 전략이라 볼 만한 부분도 없었다. 홍설이 부족했다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조모임 구성원의 책임에만 집중하는 서사에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타개책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란 이야기다.      


 조모임에 참여하는 조원들은 서로 바라보고 있는 지점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게 그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결국 점수로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나란히 줄을 서서 매우 동질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의 반영이라 생각한다. 인문대학 학생조차 인문학을 깊이 파며 토론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심지어는 소모적으로까지 느낀다. 먹고 살려면 대학 때부터 자기 살 길 먼저 찾아야 하는게 당연한 부분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많은 조모임 서사들이 그런 기저의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채 자꾸 변죽을 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탓할 대상이 필요할 때 약자들이 소환되는 것은 자주 봐온 일이다. 조모임이 실패한 것은 정말 무임 승차자들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개념을 탑재하지 않은 탓인가? 왜 무수한 조모임 이야기들 속에서 피해받는 것은 언제나 '나'고 피해 주는 것은 '남'일까? 까놓고 말해 공식 청문회도 아닌데 쿠션 좀 두들기면 어떻나? 하필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수정화장을 하는 1인에게 그렇게나 시간을 뺏겼나? 


 혐오 운운으로 논의를 '변질'시키지 말라는 반론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반문하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현재의 요구들을 다 수렴하면서도 조모임이 성공할 수 있을까? 목소리 크고 후배들이 따르는 건실한 남자 선배가 발표자를 맡고, 야무지되 조모임 내에서 연애 대상을 찾거나 '끼 부리지' 않는 여자 후배가 조사자를 맡으면 조모임은 무조건 잘 풀리나? 나머지는 양심적으로 자기 몫은 하며 잘 따라오면 되는 것이고? 그런 그림은 분명 인기가 많다. 하지만 신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세상에 그렇게 잘 되는 조모임은 없다. 






 덧) 아예 조모임이라는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또 많을 것 같다.(내가 자료를 찾아 본 N뭐위키에서도 결국 조모임 자체에 반대하며 논의가 마무리된다. 도대체 N뭐위키는 왜 항상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척 하면서 사람을 힘 빠지게 하는 얘기만 하는 걸까.) 나는 조모임 옹호자는 아니다. 쪽글 과제 한 편만 사라져도 행복할 진데 조모임이 사라지면 분명 학생들의 부담이 당장 크게 줄어들 것 같기도 하다. 헌데 우리가 조모임에 참여하며 느꼈던 어떤 불안감이나 과장된 억울함이 과연 평가방식을 바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히 사라질까? 완전경쟁체제 안에서도 '여자 애들은 독해서 아들들이 내신 경쟁에 불리하다.'는 혐오 발 핑계를 만들어 내는 세상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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