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분 쌍둥이 Sep 18. 2024

엄마가 필요한 날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엄마가 필요한 날이 꽤 많은 것 같다.

꼭 어떤 행사가 있을 때가 아니더라도 순간순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날 말이다.


적어도 우리가 초중고를 다닐 때만 해도 엄마가 학교에 오시는 날은 꽤 많았다.

학부모 참관 수업 날이나 입학식 같은 큰 행사를 제외하고도 아침 등굣길이나 급식실에서도 우리는 쉽게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우리 엄마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까지 말이다.


따라서 우리 엄마는 학교에 정말 자주 오셨다. 학부모 상담도 두 번  녹색 어머니도 두 번 급식실 봉사활동도 두 번 모든 걸 다 한 번씩 더 하셨다.

덕분에 학교에 가면 “쌍둥이 엄마!”하면서 알아보는 엄마들이 많아서 우리 엄마는 늘 복도에서 몇 시간씩 대화를 하시다 집에 늦게 오셨다.

친구들도 “쌍둥이 엄마시죠?”하면서 친근하게 말을 걸면 우리는 엄마가 인기스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 엄마는 모두 00 엄마로 불려도 늘 우리 엄마는 한결같이 쌍둥이엄마로 불리며 엄마가 필요한 날이면 꼭 참석해 주셨다.


단지 엄마 몸은 하나인데 동시에 둘 다 엄마가 필요한 게 문제였긴 했지만 말이다.

철이 없게도 쌍둥이로 자라오면서 ‘왜 이렇게 엄마가 필요한 날이 많은 거야! 나만 오늘도 엄마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면서 속으로 불평불만을 한 날이 많았다.

다행히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철이 들고 엄마가 학교에 오시는 날이 좀 줄어 다행이었지만 비교적 엄마의 손길이 더 필요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우리는 쌍둥이여도 같은 반보다 다른 반이었던 적이 더 많았다.

그래서 우리 쌍둥이에게 엄마가 필요한 날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하지만 한 명은 양보를 꼭 해야만 하는 그런 최고의 골칫거리 같은 날이었다.


그 첫 시작은 바로 유치원 때 ‘엄마와 함께하는 하루’라는 행사였다.

엄마와 하루 종일 반을 이동해 가며 두 명씩 파트너로 게임도 하고 게임도 하고 김밥도 만들어 먹는 행사였는데 엄마와 아이 한 명 이렇게 한 팀이어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문제가 없으니 평온하게 엄마 품에 앉아있고 우리 쌍둥이만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결국 선생님들의 중재 덕분에 3분 차이 동생이 결국 양보 아닌 양보를 하고 기사 아저씨와 한 팀이 되어 행사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쌍둥이 동생은 그날의 눈물 젖은 김밥 맛이 잊히지 않는다고 장난 삼아 말한다.

유치원 때인데도 그 날 만큼은 생생히 기억이 나는 거 보면 처음으로 엄마의 부재를 느낀 것이 꽤나 오래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엄마는 우리 쌍둥이가 필요한 순간에 항상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는데 유치원이나 학교를 가게 되면서부터 엄마는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엄마가 필요한 날이 생기면 “나도 엄마가 필요해.”하면서 서로 자기한테 와야 한다며 엄마 바짓가랑이를 잡고 실랑이를 했다.

그때마다 “엄마 몸은 하나인데 너희는 둘이잖아. 이번에는 한 명이 양보해.” 하면서 엄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꼭 잠깐이라도 번갈아가며 반에 들어와 인사를 해주고 가시거나 대신 아빠라도 보내주시는 그런 기지를 발휘하셨다.

그래도 늘 집에 돌아오면 꼭 투덜거리는 한 명이 있기 마련이라 잘 달래주느라 힘드셨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엄마가 필요한 날은 우리에게 늘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때는 학교에서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게 마냥 좋았는데 지금에서야 쌍둥이 엄마로서의 엄마가 필요했던 모든 날들을 되돌아본다.

항상 모든 걸 한순간 한 번에 두 개씩 해야 하는 쌍둥이 엄마. 쌍둥이 엄마로서의 엄마의 날들이 얼마나 더 힘드셨을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필요한 날은 이런 특별한 날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매일매일이 엄마가 필요한 날이었다.


내리는 비처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똑같은 핑크색 스타킹과 발레복을 두벌씩 갈아입히면서도 엄마는 단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신 적이 없다.

발레 수업이 끝나고 바로 있을 동요 발표회 얘기를 하며 우리 쌍둥이 각자에게 어울리는 곡을 추천해 주시고 수업이 끝나면 놀이터에서 그네를 공평하게 한 번씩 번갈아가며 밀어주셨던 엄마다.

그리고 밤에 잠이 들기 전까지 둘이 싸우지 않게 좋아하는 동화책을 한 권씩 읽어주셨던 우리 엄마.


그렇게 엄마는 우리 쌍둥이 때문에 매일매일 엄마가 필요한 날을 사셔야 했다.


그때는 너무 어려 엄마의 타들어가는 속도 모른 채 “엄마는 진짜 슈퍼 우먼이야.” 하면서 놀렸던 걸 반성한다.

엄마는 슈퍼 우먼이 아니라 쌍둥이 둘을 키우느라 고군분투 중이셨다는 것을 엄마가 엄마가 된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우리는 아직도 귀여운 키티를 좋아하는 철없는 애들 같은데 엄마는 우리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거기다 쌍둥이를 키웠다니 우리는 절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엄마는 항상 엄마가 필요했던 그 모든 날들이 힘들지 않고 행복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키우느라 하고 싶은 것도 포기하고 엄마로서 바쁘게 살아온 그 모든 시간들이 그저 행복이었다는 엄마의 말.

솔직히 지금은 그 말이 잘 와닿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이의 엄마가 된다면 이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오늘따라 주름진 엄마의 얼굴의 미소가 유독 우리의 마음을 더 애틋하게 만든다.


앞으로 우리 쌍둥이에게도 분명 우리가 엄마가 필요한 날보다 엄마가 우리가 필요한 날들이 많아질 것이다.

벌써 병원을 가더라도 한 명은 병원을 알아보고 한 명은 엄마 손을 잡고 같이 따라간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쌍둥이 덕분에 든든해서 좋다며 웃으신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서 살아왔던 모든 날들만큼 우리가 매일매일을 잘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조금씩 마음을 표현하려고 노력 중이다.

철없이 엄마에게 대들기도 했던 사춘기를 지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가는 엄마가 안쓰럽게 여겨지는 우리 모습을 보니 시간이 지나면 자식이 엄마의 날들을 이해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 같다.


우리의 인생에 내리는 세찬 비도 대신 맞아주셨던 엄마의 날들을 떠올리며 이제는 우리가 엄마의 인생에 내리는 비도 든든하게 막아줄 수 있는 지붕이 되어드리고 싶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서 살아왔던 그 모든 날들처럼.


여러분들도 엄마의 날들을 한 번씩 떠올려 보시면 좋을 것 같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 살아오셨던 날들을 떠올리다 보면 엄마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가끔은 이해가 안 가는 엄마의 성격과 말들 그리고 미처 몰랐던 엄마의 마음까지 지나간 날들은 우리가 찾고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다.

우리 쌍둥이는 아직 20대여서 나이가 좀 더 들면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가끔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미워하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날들의 행복이었기에 엄마와 아들, 딸의 모든 날들은 서로에게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금도 묵묵히 자식을 위해서 엄마가 필요한 모든 날들을 살아가시는 대한민국의 엄마들을 응원하며 또 쌍둥이를 키우느라 고생하신 우리 엄마께 감사를 드리며 글을 마친다.      


우리를 위한 날들을 사셨던 엄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이전 05화 인생에 내리는 비는 맞아도 괜찮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