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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끌 Mar 27. 2023

통영이에요, 지금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


지구온난화 영향이라고 하더니 올해 여름도 꽤나 뜨거울 것 같다. 개나리, 산수유, 벚꽃, 목련 등이 지난해보다도 일찍 개화를 시작했다. 3월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하지만 이 꽃들도 며칠이 지나면 푸르른 청춘이 시들듯 저물어갈 것이다.


봄이 오면 누군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가? 내겐 그런 사람이 있다. 벚꽃이 질 무렵에 만났다 헤어져서인지 봄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면 어느 때보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한다. 오래 알고 지냈건,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었든 간에. 기억은 퇴색해 가지만 그 시절에 대한 설렘이나 아련함 같은 감정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깊은 한숨처럼 발길을 잡아 끈다.


몸과 맘이 따로 노는 것 같은 올봄엔 유난히 책 읽는 게 버겁게 느껴진다. 이제 서평도 좀 내려놔야겠다 생각했건만 <통영이에요, 지금>이란 특이한 제목의 책 한 권을 받아 들고 주말 내내 고민했다. 봄꽃이 너무 활짝 피고 있어서 책 속에만 얼굴을 파묻고 있을 수는 없었다.



p.26

그가 바닥에서 집어 든 흰 서류 봉투는 한껏 두툼했다. 400자 원고지 뭉치였다. 작고 빡빡한 네모 칸에 반듯한 글자들이 촘촘했다. 이로 씨가 통째로 갖고 있다던 '그녀의 원고'였다. 소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던.


p.31

잠을 안 재우고 남자는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었다. 자술서를 쓰고 찢고 쓰고 찢게 했다. 아주 다 똑같았다. 그래서 이건 꿈이구나, 꿈이야. 듣던 얘기들이 뭉쳐져서 너절한 악몽이 된 거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이게 이토록 진부하고 식상하고 지독하게 지겨울 수밖에 없는 거구나.



그런데, "그럴 테죠?"라는 말에 이끌렸다. 지난 주말에 벚꽃이 핀 길을 따라 잠시 걷다 와서 책을 읽어서 그런지 꽃봉오리에 꽃잎이 몇 개가 붙었는지, 별 시답지 않은 생각에 빠지기도 여러 번... 그래도 소설책은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좀 더 집중력이 필요하단 말씀.


일단 읽어 보자란 생각을 하다가 통영에 가본 적이 있었나? 불현듯 그런 생각을 떠올려 보니 딱히 통영에 가본 적은 없었다. 목포, 여수는 몇 번 가봤는데, 통영엔 왜 가보지 못했을까. 통영이 어떤 곳인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으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구효서 작가가 새롭게 선보인 <통영이에요, 지금>에서 설명하는 통영이란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다가가 잘 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카페 Tolo라는 카페도 어렴풋한 인상만 있다. 어찌 됐든 이 소설은 이로라는 소설가가 김재원 형에게 보내는 형식의 글로 시작된다.


p.40

에잇! 글 같은 거 당분간 쓰지 말아 보자, 하고 떠나온 여행이잖아요. 눈 질끈 감고 그렇게 떠나온 긴 여행이었으니 그동안 한 줄도 안 썼죠. 그런데 형에게 기어코 편지를 쓰고 마네요. 몇 가지 우연한 일이 겹쳤기 때문이에요. 그것들을 형에게 얘기하려는 거고요.


p.78

원고 속의 희린이 이 도시 동쪽 언덕의 Tolo 주인이었던 거에요. 그녀와 내가 같은 도시에 머무는 우연을 그녀의 아들 박솔이 알고 엇! 놀랐던 거고요. 나는 그가 왜 엇! 했는 줄 모르다가 만화방에 갔던 날 번쩍 알아버리고 앗! 소리를 지른 거죠.



소설가 이로는 37년간 쉬지 않고 글을 써서 36권의 책을 냈다고 한다. 와~ 대단하다. 30년 이상을 쉬지 않고 1년에 1권씩 냈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런 소설가가 요즘 하는 일은 한적한 도시와 시골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휴식을 찾아서 말이다.


그런데 통영에 있는 Tolo에 들려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다 보니, 그곳의 여주인과 친해졌다는 말을 편지에 썼다. 오호라~ 왠지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런 달콤 쌉싸름한 뉘앙스는 초장에 잔뜩 뭉개져 버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사람과의 인연이 담긴 이야기를 원고로 받아든 이로는 자신의 이야기에 원고 속 이야기를 조금씩 형에게 전달할 생각이다. 그런데, 세상에나 슬픈 이야기가 참 많다. 험난한 그들의 이야기 전개는 서두에 쓴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다. 구효서 작가는 가수 김필이 부른 산울림의 <청춘>을 듣다가 이 소설의 한 챕터를 썼다고 한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p.83

주은후는 보충역 복학생으로 나보다 두 살 많았다. 예비역이면 현역이나 보충역이나 상관없이 형이라고 불렀다. 남학생도 여학생도 예비역 복학생을 형이라고 불렀다.


p.84

7년 만에 나타난 그가 나에게 당부한 건 한 가지였다. 만났었다는 사실을 김상헌에게 말하지 마라. 내가 상념에서 문득 깨어났을 때 주은후는 이미 낙엽 구르는 길 위를 멀어지고 있었다. 그를 또 볼 수 있을까. 아무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떠났으나 또다시 못 볼 거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 노래 한 곡 듣고 필이 꽂혀 쓱쓱 한 챕터를 써 내려갔다고 하니 글 쓰는 사람은 따로 있나 보다. 어느 순간 이런 이야기의 영감이 떠오른 것일까? 어찌 됐든 1980년대 '주사파'를 잡아 고문하던 안기부 시절에 있던 고문 이야기는 글로만 읽어도 끔찍하게 느껴진다. 마치 영화 <1987>의 고문 장면이 겹쳐 보이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통영이에요, 지금>은 전체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소설가 이로의 일상을 시작으로 이로가 쓰는 편지, 이로가 읽는 원고라는 3가지 형태의 일들이 교차하며 서술되고 있다. 나처럼 봄꽃에 빠져 있다가 읽게 되면 무슨 소린지 헷갈릴 수 있다. 처음부터 다시 스토리를 따라가야 할 수도 있으니 초반에는 책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어찌 됐든 이로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했던 여인은 생각했던 그 여자다. 박희린. 주사파로 활동 중이던 주은후와 사귀었다는 이유로 그녀는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조사를 받았다는. 그런 희린을 사모했던 파견 근무 중이던 행정직 경찰 공무원 김상헌은 양심선언을 하고 모든 것을 잃고 나서 그녀를 만나 함께 산다. 그런데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던 그녀의 전 남자친구 주은후가 돌아왔다. 그녀 앞에...


이게 다 무슨 일인가? 그들 세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 선의 연결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마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화려하지만 떨어지는 꽃잎에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다. 벚꽃 피는 봄에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이 포스팅은 해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https://blog.naver.com/twinkaka/2230572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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