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한낮의 기온은 33도를 넘나들었고, 열대야는 한 달 넘게 우리를 잠 못 들게 했다. 그런 날들이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을 햇볕 아래 고추를 말린다며 바쁘다. 덥고 습했던 한여름의 무더위가 어느새 고온 건조한 가을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을이 오는 길목에 서서 광화문 광장을 지나, 오래된 성곽 앞에 다다른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고성의 모습 앞에서 문득 세월의 무상함이 마음 깊이 스며든다. 지나가는 계절과 함께, 나도 또 한 걸음 떠나보낸다.
광화문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나뭇잎을 살며시 흔든다. 가을의 색이 묻어나기 시작한 이 길을 걷고 있자니, 마음도 어느새 가벼워진다. 여름의 무더위와 답답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가을의 선선한 공기가 광장을 채운다. 한참을 맴돌던 더위가 갑작스레 사라진 듯, 이 바람은 너무도 부드럽고 상쾌하다.
바닥에 깔린 돌들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생긴다. 햇볕은 한결 더 따뜻해졌고, 그 따스함이 묘하게 나를 안아주는 것 같다. 가을볕은 더 이상 타들어가는 듯한 열기가 아닌, 몸과 마음을 감싸는 포근함을 느끼게 해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걸음으로 광장을 지나치지만, 그들의 얼굴엔 여름보다 더 편안한 미소가 흐른다. 광화문광장은 언제나 북적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속에서도 고요한 평화가 느껴진다.
가을은 그렇게 속삭이듯 찾아오는 것 같다. 무겁게 짓누르던 한여름의 열기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라는 듯한 뜨거운 열기와 바람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잎사귀는 천천히 색을 바꾸기 시작했고, 바람은 조금씩 더 차가워지고 있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면, 나무들이 우거진 이곳에서 바람이 날아올 때마다 들리는 잔잔한 속삭임이 마음 깊은 곳에 와닿는다.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가을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해준다.
시간의 흐름을 마주하게 하는 계절, 가을이다. 광화문 광장 앞을 지나며 가을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껴. 잠시 멈춰 서서 말이야." 가을은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이제 곧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한걸음 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서서, 광화문을 바라본다.
* 출처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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