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즐거워야 한다.
며칠 산더미 같은 일에서 허우적댔다. 중간에 헉- 소리가 날 정도였다. 퇴근하고 오니, 뛰어노느라 지친 아이가 짜증을 낸다. 그러나 나도 아이의 짜증을 받아줄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감정을 꾹 누르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앞으로 짜증 세 번 내면, 바로 자러 가는 거야." 잠자러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 약점을 이용한다.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엄마가 시골 할머니댁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비상이었다.
언니랑 나는 엄마 눈치 보기에 바빴고, 미리 방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해 놓았다. 시집살이에 시달린 엄마의 날카로운 신경을 건들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딸, 아들, 딸, 아들 중 세 번째로 태어난 딸로 전혀 주목받지 못한 위치로 태어나서 눈치가 누구보다 더 빨라야 했다.
'눈치 보는 것', 그것은 너무 싫은 일이었으나,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엄마의 비위를 맞춰야만이, 그나마 주목받을 수 셋째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장과정에서 어른이 되고 보니, 다 큰 뒤, 나로 인한 일이 아닌데, 나는 왜 눈치를 봐야 하는가,에 대한 억울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고 배웠을까. 나도 한 때 무의식적으로 그랬었는지, 친한 주위사람에게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정신이 바짝 났다. 그러다 보니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나의 나쁜 감정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말자."가 나의 한 가지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특히 엄마는 아이에게 절대 권력자임으로 절대 화를 전가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나의 나쁜 감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무디게 키우고 싶지는 않지만, 아이 잘못이 아닌 다른 일로 아이가 눈치 보게는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인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게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골똘히 생각하다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나는 즐거워야 한다', 가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엄마는 즐거워야 한다." 나만의 시간을 갖고 나만의 시간에 나쁜 에너지는 최대한 버린다. 독서, 커피, 필사, 친구와의 수다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힘든 것들을 버릴 수 있다면, 나만의 시간 확보에 더 힘을 기울여도 된다. 육아는 투입되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라고 내 마음대로 정의해 본다. 사실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데,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필사하고 짧은 글을 쓰고 독서를 이어가는 이유다.
그리고 가끔은 너는 흰밥에 김이랑 먹더라도, '내 위주의 메뉴'로 식당을 선택하는 이유다.
내 시간이 채워지고, 그렇게 엄마의 기분을 좋게 유지해야 내 아이가 즐거울 수 있다.
(이런 나의 자유시간도 너와 이렇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결론은...
자기 자신을 먼저 돌보고, 아이를 돌보고, 가족을 돌보자.
지금 판단에는 이게 맞는 순서라고 믿고 갈 거라는 이야기.
자식입장이 되어 보니 당당한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다 낫더라는 개인적인 생각에 대한 의견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가 된 우리 엄마는 아직도 몸매부터가 패션 리더다.
젊었을 적에 경제적 사정에, 딸린 아이들에, 내지 못한 멋을 지금 한창 부리시는 중이다.
"옷 또 샀어?" 하면, 내 돈으로 내가 사 입는 것 잔소리하지 말아라! 하신다.
그리고 자식들 결혼하기 전에 선언하셨다.
"그 누구도 애 맡길 생각하지 마라."
물론 가끔은 맡아주시기도 하지만, 일정이나 약속이 워낙 많아 맡기는데 예약이 필수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이렇게 자신을 위하는 것에 사실 감사한다.
아끼고 아껴 살면서 힘없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인다면, 자식 입장에서 나는 더 짜증이 날지도 모른다.
"너희들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보다는
당당하고 제멋대로인 할머니가 훨씬, 훨씬 좋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