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 크는 나의 어린이, 나도 같이 크자.
주말 외출을 위해 신발을 신는 아이의 눈에 새로운 신발이 보였는지, 아빠에게 묻는다.
"이거 아빠 신발이야? 새로 샀어?"
"아니, 엄마 신발이야. 작년에 산 거야."
남편이 나의 여름운동화를 꺼내 놓은 걸 보고 둘이 대화를 나눈다.
나도 깜빡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발도 더웠는데 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바로 신고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나와 먼저 내린 아이가 묻는다.
"엄마, 그런데 엄마 작년에 산 운동화가 아직도 맞아?"
순간 이게 무슨 말이지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엄마는 발이 이제 안 큰단다."
"언제부터 발이 안 컸어?"
"글쎄다, 고등학교 때인가.. 스무 살 전쯤?" 하다가 내 발이 성장을 언제 멈추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내 나이를 생각해 보고, 이제 발도 키도 줄어들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리고 갑자기 아이의 질문이 한없이 귀엽다고 생각된다.
(기록이 필수)
나의 시선, 그리고 아이의 시선이 이렇게 다르다. 그런데 가끔 나는 깜빡깜빡하고 만다.
아이는 발이 부쩍부쩍 커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 운동화를 사야 할 지경이다. 아이에게 새 신발은 편할 리가 없다. 신고 벗을 때 앉아서 신는 신발도 영 싫은가 보다. 길이 들어서 대충 발을 구겨 넣고 뛰어나가야 좋은데, 찍찍이를 떼고 발을 집어넣어야 하는 그 신발이 귀찮은 것이다.
그래서 조금의 틈도 없고 발에 아주 딱 맞는, 그리고 더러워진 헌 운동화를 고집하고, 새 운동화는 화요일만 신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왜 화요일인지는 대답을 안 해줘서 모르겠지만, 아마 어린이집에서 야외활동을 덜 하나보다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우리 집 어린이는 아빠랑 겨우 합의를 보았는지 화수, 그리고 주말에는 새 신발을 신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아이에게는 신발을 벗고 신는 것이 이리 큰 일인지, 나는 어린이의 시선으로 생각해 보았다.
(엄마의 시선은 그저 네가 더러운 운동화를 신고 가는 게 남들 눈에 보일 까봐에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어린이의 세계, 나도 한 때 어린이였으나 왜 이렇게 자주 잊는지 그 시선에서 자꾸 벗어난다.
가장 심각한 것은 나의 눈높이에서 본 아이의 시간. 자꾸 재촉하는 그 시간일 테지만, 어디 그뿐일까 생각이 든다.
최근에 마침 책장에 꽂혀 있던 <어린이라는 세계>를 우연히 꺼내 다시 읽었는데, 이 책에서도 '어린이가 신발을 신고 벗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고개를 마구 끄덕끄덕했다. 집에 어린이가 있어서인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 이 책에 그 내용에 감탄하여 나는 여러 구절을 필사했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 보면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어른스럽게 들리는지 알게 된다.
의외로 반말을 쓸 때보다 대화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진짜 권위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인 대화를 어린이도 사양하지 않는다.
존댓말을 들은 어린이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더욱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그런 대화가 몸에 밴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에세이
모든 어린이들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이들이라고 작게만 보는 건 아닌지 어른들의 시선에만 맞추려고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존중받을 어른으로 컸는지도 점검해야 하고, 어린이에게 진정 존중을 보여줄 때, 우리의 어린이가 '진정한 존중'을 아는 어른으로 근사하게 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엄마는 이제 키도 발도 안 크지만, 노력하여 마음은 키우고 또 키울 테니, 우리 서로 잘 커 보자.
오늘의 생각이다.
<어린이라는 세계> 책에서 한 구절 더 붙인다. 보고 또 봐도 좋으므로.
어린 시절은 어린이 자신보다 어른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분이 많은 구간이다.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수정할 수도, 지어낼 수도, 마음대로 잊을 수도 없다.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뒤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
시차는 추억을 더 애틋하게 만들고 상처를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든다.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이 각자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자랐는지 깨닫고 자주 마음이 좁아졌다.
내가 제일 부러워한 건 '곱게 자라서 맺힌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상적인 어린 시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갖지 못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 인생이 일찌감치 모양 잡힌 것 같아서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에세이
나의 어린이에게 어떻게 대할지는 순전히 내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