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선함과 착함에 대한 기대치가 유난히 높고 무조건 찬사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지나친 선행이나 헌신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착함을 베풀어 주는 쪽이나 그것을 받는 쪽 모두에게 그렇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 소위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 하기도 하고 예스맨들, 상대에게 No라고 하지 못하고 주변의 모든 부탁과 청들을 들어줘야 하는 사람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되어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의 존재는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 삶의 이유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오래되다 보면 주변의 사람들은 나의 선행과 친절을 당연시 여기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런 착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기도 하기 때문에 후에 심리적 공허함이나 우울증이나 불안 등에 취햑한 사람이 된다. 그러니 이런 식은 착함은 절대로 자신을 건강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또한 반대로 이런 헌신이나 친절을 받는 사람들도 사실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친구사이에서 맨날 밥을 사주거나 비싼 선물을 받는 쪽은 베풀어 주는 친구가 고맙기도 하지만 갚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서 오는 부담감이 있다. 특별히 가족 안에서 딸을 위한다고 딸이 원하지도 않는데 사는 집의 청소를 하고 살림을 살아주는 엄마나 아이들이 공부하는 동안 함께 잠도 자지 않고 지켜주는 부모 같은 경우 자녀는 부모의 헌신이 고맙기도 하지만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의 그런 헌신과 희생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 관계가 되면 되면 받는 사람은 베풀어준 사람에게 정서적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종류의 빚이라고 가지고 있게 되면 불편하고 털어버리고 싶다. 그래서 그 정서적 빚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왠지 이런 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고 항상 베풀어 주는 친구가 원하는 데로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내가 원하는 삶과 나를 위해 희생을 해준 사람이 원하는 삶 가운데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갈등은 인간관계에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래서 건강한 선행과 착함은 상대가 원하는 방법과 방식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좋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이고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베푸는 것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가장 성숙한 관계는 나의 생각을 투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상대의 의견과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상대가 나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 따라서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면서 까지 남을 돕는 것은 건강할 수 없다.
따라서 건강한 친절은 내가 베풀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정도의 친절과 선행이면 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해준 것의 반의 반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싸운다. 그 말속에는 자신이 이전에 해준 친절과 헌신에 대가가 있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대가가 따르는 친절과 헌신을 달가워할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다.
누군가 너무 희생하고 헌신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이다. 건강한 관계는 서로 평등하면서 서로의 의사와 생각을 존중하고 소통이 잘되는 투명한 관계이다. 서로 간의 원하지 않는 친절과 선행으로 고마움과 불편함과 부담스러움이 얽혀있는 관계보다 적절한 거리와 명확한 소통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훨씬 건강한 관계이다. 너무 착한 것은 절대로 착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