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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하게 살지 않아도 돼

by 원정미

젊은 시절 나는 너무 비장했다. 비장하게 유학을 왔고 비장하게 결혼을 하고 비장하게 육아를 했다. 마치 실수나 실패는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진지함을 누군가를 신중하다 하고 누군가는 열심히이고 멋있다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인생에서 실수와 실패는 보란 듯이 자주 일어났고 그렇게 비장하면 할수록 나의 실패와 실수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크게 보이는 나의 실패와 어리석은 생각들은 나를 주눅 들게 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고 깨달은 것이 있다. 인생은 한숨에 달려야 하는 단거리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는 것과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비장하게 임해야 할 것은 많이 없다는 것이었다. 안되면 죽을 것 같았던 일들도 1-2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10년쯤 지나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수능성적과 어느 대학 졸업장이 인생의 전부인 것 같아 보인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마흔을 넘기니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도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중년쯤 되면 중고등학교의 성적이나 대학 학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책임감 있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다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들 아무 관심이 없다. 그렇게 10년만 지나도 쓸모 없어지는 것에 우리는 목숨을 바치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나에겐 아이 출산할 때 정도가 가장 비장해야 할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으니..


비장함이란 마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바치는 열사나 화재가 난 빌딩 안으로 들어가는 소방관분들에게 해당되는 게 아닐까 싶다.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비장함을 요구하는 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우리 사회는 모든 것에 비장함을 기대하는 것 같다. 대학을 떨어지면 마치 인생에 실패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원하는 대학을 떨어지는 것도, 원하는 직장이 안 되는 것도, 원하는 직업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아이들이 내 맘대로 크지 않는 것도 사실 시간이 다 지나면 괜찮아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성취를 빨리빨리 이루지 못하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몰고 가기에 이 모든 일에 너무 비장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 이렇게 비장한 각오로 임하면 우리는 쉽게 삶의 균형이 깨어져 버릴 수 있다. 지금 닥친 일이 너무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 되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정작 삶에서 중요한 다른 일들을 놓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의 커리어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 가족과 멀어지는지 모른다. 아이의 성공에 올인함으로 배우자와 자녀들과 오히려 멀어지고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


더 나아가 아무리 이렇게 비장하게 준비하고 임해도 성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 그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비장하게 임하기 위해 다른 것은 다 희생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했다고 해도 그 기쁨은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또 비장하게 임해야 할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비장함은 우리의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비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우리 인생에 이루어야 할 과업들은 끝이 없고 비장하게 임한 모든 것들이 성공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 결과에 실망하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삶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 알았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비장하게 임해야 할 것들은 많이 없다는 사실은.. 사실 대부분의 것들이 되고 그만 안되고 그만인 것들이었다. 내가 미국에 올 때는 훌륭한 교수가 되겠다고 비장하게 결심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은 지금의 삶에 너무 만족하고 있다. 육아를 할 때 " 꼭 행복한 아이/ 완벽한 아이를 키울 거야!라는 나의 비장함은 아이에게 족쇄와 올무만 될 뿐이었다. 나의 그 비장함 때문에 아이에게 오히려 많은 상처를 입혔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 지금은 " 한번 해보지 뭐 안되면 말고"라는 마음이 훨씬 많아졌다. 그냥 물 흘러가듯 가는 내 인생을 억지로 바꾸거나 붙잡지 않게 되었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영원하진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중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힘들고 슬픈 일도 언젠가 없어질 것이고 좋은 일은 내 삶의 깜짝 선물처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달라졌다. 마치 장애물 경기를 하던 선수 같았던 인생은 혼자 여행을 하는 여행자 같은 마음이 되었다. 때론 내가 원하는 데로 가지 못하고 때론 여행지의 음식이 내 입맛에 맞지 않을 지라도 그건 오늘의 불행일 뿐이라고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비바람이 치고 풍랑이 치면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것도 알았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멋진 풍경을 보기도 하고 예상치도 못한 환대를 받을 수도 있고 생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이 여행자의 특권인 것처럼 나도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렇게 보게 되었다. 그렇게 비장함을 내려놓으니 감사함과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힘을 빼고 삶을 바라보니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고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끔은 진중하고 비장함이 요구되는 시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생각보다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앞으로 다가올 새해도 그렇게 선물처럼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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