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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Mar 03. 2022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과거에는 모르고 지나갔는데 성인이 되어 돌아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그 일들은 어린 시절엔 멋모르고 지나갔으나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서 꽤 중요한 사건들이었고 나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들이다.


1. 나는 선택적 함구증 (Seletive Mutism)이 있었다.

선택적 함구증은 말하거나 듣는 언어기능엔 문제가 없지만 특정 사회적 상황에서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지금은 육아방송에서도 종종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과거엔 이런 개념조차 없었다. 그냥 낯을 많이 가리고 수줍음이 심한 정도로만 치부했다. 사실 이 선택적 함구증은 불안이 높은 아이들이 학교와 같은 낯선 상황에서 많이 발생한다. 나 또한 새 학기가 되거나 낯선 환경에선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혼자 학교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몇달이 지나야 겨우 친구 한둘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이런 기질을 제대로 인지하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선택적 함구증은 사회성 불안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그러니 나 또한 불안이 매우 높은 아이였다. 이런 나의 기질을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런 나의 기질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내 안의 사실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다. 나는 왜 이렇게 겁이 많을까? 말을 잘하지 못할까? 소심한 걸까? 하며 스스로 자책하며 보낸 시간이 있었다. 만약 그때 누군가 나를 다독여주고 괜찮다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시간들이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2. 나는 아동 납치, 성범죄 피해자가 될 뻔했다.

요즘은 아동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나 규제가 엄격해졌지만 사실 내가 어릴때만 해도 그런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당한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었다. 벌써 그 일이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내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집에 숙제를 하러 가는 길에 낯선 아저씨가 내 어깨를 감싸고 내 목에 도루코 칼을 들이대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가서 나무가 우거진 빈 공터에 가더니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그 당시 그 아저씨가 왜 바지를 벗으려는 지도 알지도 못했다. 다만 그 아저씨가 칼을 들고 있다는 것에 겁에 질린 기억만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알고 보니 그놈은 나를 성폭행하려고 시도했던 행동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나는 그 아저씨가 허리띠를 푸르고 바지를 벗으려고 하는 찰나 잽싸게 도망쳤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지만 그 아저씨가 나를 잡으려면 다시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동안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본능적으로 생각했고 그 생각은 너무 옳았다. 나는 나의 그 선택을 평생을 두고 감사하고 있다. 내가 만약 그 몹쓸 짓을 당했다면 내 성격에 아마  지금 살아있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울면서 집으로 들어가서 엄마한테 말했지만 나는 그날 밖으로 싸돌아다닌 것으로 엄마에게 혼만 나고 말았다. 사실 나는 그놈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설명도 못할 만큼 어린아이였다. 거기다 그 당시 엄마는 나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여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집에서 하는 아버지 사업일에 너무 바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집 밖으로 돌아다녀서 그 나쁜 아저씨를 만났다는 것과 혹시 그 아저씨가 나를 기억하고 다시  나를 덮칠까 봐 한동안 혼자서 밖을 나가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그때 아동 성범죄의 뜸한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놈을 한테 당한 것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 사건 때문에 나는 안 그래도 없었던 세상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낯선 아저씨의 공격과 엄마의 냉대는 "세상에 나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나는 나 스스로 지켜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무의적으로 배우게 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독립적이 되었고 방어적이 되었다.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고 그렇게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이 중해지고 있었다. 그 사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30년이 넘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나이가 중년이 넘어가도 낯선 남자와 단 둘이 있는 것은  나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의사도 여의사들을 선택하고  남자들이 많은 장소나 직업을 피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3. 나는 역기능 가정 (Dyfuntional family)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엔 부모님 두 분이 살아계시고 삼시세끼 밥 먹고 잠잘 곳만 있으면 괜찮은 가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로 우리 집을 나름 분석해 보니 부모님은 모두 심각한 아동학대 피해자셨다. 외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PTSD를 앓으셨고 친할머니는 나르시시스트인격 장애를 가지신 분이었다. 이런 분들 밑에서 자란 부모님은 가정폭력, 신체학대, 언어학대에 노출이 되셨고 부모님 모두 거기에 대한 자각이 없으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의 세대에 되물림이 되었다. 그렇게 나도 아동학대의 2차 피해를 입으며 성장했다.


 거기다 19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우리 가정의 문화와 교육 수준은 여전히 1960년대 즈음에 머물러 있었다. 나의 외할머니 친할머니 모두 공교육은 아예 받지 못하셨고 그 당시 친가 외가를 통틀어 대학을 졸업한 여자는 전무했다. 그러니 남아 선호 사상과 유교 사상이 너무 심했고 집안에서 여자를 마치 남자의 부속물처럼 여겼다. 나에게도 늘 내 팔자는 남편에게 달렸다며 시집이나 잘 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한마디로 우리 가정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안으로는 가정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절엔  그 누구도 이 모든 어려움과 불행에 대해 나에게 " 네 탓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의 타고난 기질도, 그 골목에서 나쁜 아저씨를 만난 것도 우리 집이 따뜻하고 건강한 가족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아무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나를 많이 자책하며 탓하며 살았다.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고 겁 많은 멍청이 일까? 왜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친구 집에 간다고 나서서 그 아저씨를 만났을까?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나 사랑받지 못할까?" 등등 그 모든 이유에 원인을 나라고 생각하며 자책하고 살았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이고 연약한 피해자라는 였음에도 말이다.


아마 그 때문에  지금 내가 학교 상담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리고 연약하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거나 객관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모든 불행의 탓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때문에 누군가 어린시절 나처럼 그렇게 자신을 탓하지 않기를 하는 마음에서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그 누구보다 크다. 세상엔 네가 정말 잘못해서 일어나는 일보다 네가 어려서 내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비록 그 환경 자체는 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불행의 탓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자책하는 일은 하지 않기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비하와 원망은 스스로를 병들게  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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