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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Mar 10. 2022

미국에 살아서 쫌 억울한 것 #1

산후조리


미국에 와서 생활한 지가 22년째가 되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땐 미국에 온 지 십 년이 넘었다는 사람들만 봐도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선배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젠 어딜 가나 꿀리지 않을 정도의 연배가 있는 이민자가 되어버렸다.


성인이 된 후 이민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민 초기엔  향수병으로 힘들어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에 산지 20년이 넘었어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미국이 비교나 관습에서 자유로운 나라여서 좋았고 지금은  미국 생활에 너무 적응이 되어 한국에 나간다면 오히려 " 미국 바보"가 될 것 같아서 못 나갈 것 같다. 그리고 한국에 나가고 싶을 만큼의 간절한 무언가가  지금까지 사실 나에겐 없었다. 시랑하는 가족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도 모두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 눈이 부시게 발전하면서 요즘은 미국에 살고 있는 것에 살짝 억울한 것이 몇 가지가 있긴 하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이 산후조리원 서비스이다.


여성 불평등이니 맘충이니 하는 말들이 있긴 하지만 사실 한국만큼 산후조리시스템이 잘되어있는 나라가 없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지역마다 산호 조리 시절이 없는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은 이런 시스템 자체가 없다. 선진국이라 하는 미국도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그날부터 바로 엄마가 아이를 옆에 두고 돌보아야 한다. 거기다 음식이라고 주는 것이 대부분 차가운 주스나 식은 피자 혹은 파스타가 전부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그들 나름의 이유도 있다. 아기가 곁에 있어야 애착형성도 잘되고 모유수유의 확률도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막 10-20시간이 넘는 진통과 생사를 넘나드는 출산과정을 거친 산모가 태어나서 지금 막 태어난 아기를 돌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다 미국은 병원에 따라 보호자가 숙식이 안되거나 방문시간이 정해져 있는 곳도 있어서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산모가 홀로 신생아와 며칠밤을 보내야 한다.


나도 첫아이를 낳고 보낸 첫날밤을 잊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날 밤부터 약한 진통이 시작되어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렸다. (처음 진통의 시작은 마치 배탈이 난 것처럼 아프기 때문이다. ) 그렇게 밤새 잠을 못 자고 그 주기가 짧아지는 것을 알고 진짜 아기가 나오려는 진통인 줄 깨달았다. 그래서 병원 갈 준비를 아침부터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2시간 후 지나고 나서야 딸을 만났다. 그 12시간은 태어나서 모두 처음 해보는 것들이었다. 처음 경험해 보는 뒤틀리는 고통과 처음 해보는 악다구니와 비명 그리고 처음 해보는 출산.. 정말 내 몸에 있는 진액과 모든 에너지를 따 쥐어짜고 나서야 딸을 만났다.


원래 체력도 없는 내가 전날 잠도 못잔채 그렇게 있는 힘을 다 빼고 거기다 딸아이가 뚫고 나온 아랫도리는 완전 너덜너덜 난리가 나서 나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정말 기진맥진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깨끗하게 씻긴 아이를 나에게 던져놓고 나가버리는 거였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지금 나는 만신창이의 몸인데 나보고 어떻게 신생아를 보라고..


 평소에 아이를 좋아해도 이런 신생아는 난생처음이었다.  평생 해보지 않았던 신생아 기저귀 갈기나 옷 입히기 그리고 모유수유는 또 다른 세상이였다. 거기다 그 당시 병원 방침은 보호자가 밤새 함께 있어줄 수가 없어서 남편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딸과 덩그러니 병원에 혼자 남았고 그날 밤 나는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기진맥진해서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질 것 같았는데 간호사는 2시간마다 와서 나를 깨웠다. 아기에게 을 줘야 한다며.. 그러나 초산이었던 나는 젖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먹성이 대단했던 딸은 젖이 나오지 않으니 울고 보채기를 시작했다. 그러니 나는 나오지도 않는 젖을 억지로 물리며 아이를 밤새 달래야만 했다. 정말 유두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젖을 빨아대던 딸 덕분에 기어이 상처가 나고 후에, 거기로 세균이 들어야 기어이 유선염이 걸려 며칠 고생한 적이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배고픈 딸과 자고 싶은 엄마의 한마탕 난리로 날을 꼴딱 새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서 친정엄마의 살뜰한 보살핌이 있었지만 산후조리는 가족 모두에게 힘든 일이였다. 삼시세끼 밥을 하고 살림을 하시던 엄마도 일을 다니며 간간히 나의 시중을 들어주는 남편에게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가끔 TV에서 보이는 산후조리원의 체계적인 시스템이나 돌봄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한국에 있었다면 나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치열하고 피곤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간이 길어봐야 고작 한 달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한 달이 어딘가. 그 한 달 뒤에 정말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산모와 배우자가 푹 쉴 수 있는 한 달은 너무 귀할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을 아이 셋을 낳고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게 한국 엄마로 좀 억울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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