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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Aug 23. 2022

영원한 숙제, 영어

이제 미국에 산지 22년이 넘어간다. 미국에  도착하고  맥도널드에서 for here? or to go?라고 물어보는 직원의 질문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당황하던 나였다. 누군가에게 " Thank you!"가 입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몇 달이 걸렸다. 그러니 그땐 미국에서 오래 산 분들이 참 부러웠다. 10년 아니 20년쯤 살면 자연스럽게 원어민처럼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에 살면서 나는 언어의 실체를  보았다. 언어는 사용해야만 실력이 는다는 것을. 아무리 미국에 40년 50년을 살아도 엘에이 한인타운 같은 곳에서 산다면 하루에 영어 한마디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런 분들은 그냥 미국 속의 한국에 살기 때문에 영어가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영어가 두려워지기만 한다.


 언어는 어디에 살고 있는지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용량에 달려있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에 살아도 원어민처럼 듣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영어가 능통할 것이라는 오해는 잘하지 않는다.


나 또한 미국에  20년 넘게 살아도 10년 정도는  한국 커뮤니티를 벗어나지 않아서 영어를 써야만 하는 상황을 늘 피해 다녔다. 그러다 겁도 없이 상담대학원을 진학하고 나서 제대로 미국 사회 속에 발을 디딛기 시작했다. 정말 영어로  된 책과 논문에 깔려 죽는 것 같았고 발표와 토론 수업에 사지가 마비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마치 수영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영어로 된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숨쉴틈 없이 몰아치다 보니  수영을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전엔 머릿속으로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인지 늘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대학원에 가선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그냥  문법이 맞든 지 안 맞든 지 일단 말을 시작해야 했고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허접한 영어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타인의 의식에서 좀 벗어나기 시작하자  용기가 생기고 그렇게 일상적인 대화는 무척 편해졌다. 그래서 그전엔 죽어도 하기 싫어하던 병원 진료, 관공서 업무, 우리 아이들 선생님 면담 등 일상 업무는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치료사가 되어 상담할 때는 긴장이 된다. 말은  문장의 뉘앙스와 단어선택에 따라 의미가 무척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같은 외국인들에겐 더더욱 힘들다. 그 미묘한 차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이들은 보통 매우 언어에 너그러운 편이지만 ( 왜냐하면 그들도 완벽하지 않음으로^^) 원어민 부모들과 면담을 할 때면 위축이 될 때가 많고 그렇게 위축되고 긴장하는  날에 문법도 꼬이고 발음도 꼬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래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하지도 못하고 엉뚱한 말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되는 날은 그야말로 밤에 자다가 이불 킥을 하는 것이다.  "아.. 그때 이렇게 표현해야 했는데.. 원래 쓰려고 했던  단어가 이거였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면 나의 부족한 영어 때문에 나의 전문성까지 반토막 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서 믿음직스러운 치료사로 안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도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돌아보면 아무리 전문직 이어도 내가 사는 동네엔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은  많았다. 대학교를 다닐 때 교수들도 그랬고 의사들도 그랬다. 정말 심각한 양과 단순한 문법만 반복해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이유로 나는 그들의 능력이나 전문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 경우는 매우 적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상담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고 그러니 나의 영어 실력과 관계없이 내가 싫은 다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냥 아시안이란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여자라 싫을 수도 있고 나의 태도와  접근방법이 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어에 대한 나의 자격지심이 때로는 그 모든 이유를 잊게 한다. 이런 문제가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이고 오해이다. 남들은 인지하지도 않는 것을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 전문분야에서도 영어로 편하게 술술 말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고작 진짜 미국 사회에 입문한 것은 고작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하루 종일 영어로 쓰고 말하고 있지도 않으니 내가 원어민처럼 말하고 싶다는 나의 마음은 어쩌면 욕심인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 열등감이고 자격지심이다.  이런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치료사의 치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치료사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치료사보다는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남아있는 언어에 대한 나의 열등감을 먼저 다스리는 것이 어쩌면 치료사로서  우선 해야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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