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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Sep 07. 2022

이젠 싸워도 밥은 먹는다.

나는 화가 나거나 속상하거나 긴장하면 밥을 먹지 않았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도, 매 학기 미국에서 첫 학기 첫 수업을 들어갈 때도, 불편한 사람들과 밥을 먹어야 할 때 혹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예의상으로 먹어야 할 때... 마치 장이 멈춰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먹으면 항상 탈이 났었다. 그래서 보통은 굶는 것이 편했다.


특히 신혼엔 남편과 싸움을 하면 몇 끼씩 단식투쟁을 했다. 내가 안 먹으니 당연히 밥을 잘 려주지도 않았다. 마치 이젠 완전히 끝인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부부싸움은 부부싸움이고 가족들밥은 늘 평소대로 챙긴다. 그리고 나도 적게 먹더라도 될 수 있으면 굶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남편과 나는 언젠가 화해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으로 우리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젠 서로가 너무 잘 안다. 우리의 싸움은 그냥 서로 간의 오해로 인한 사소한 갈등이니까.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오래 살았다 해도 이런 갈등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리고 우린 언제나 다시 화해하고 잘 지냈으니까.


또 밥을 먹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싸우고 밥도 먹지 않고 평소의 일상이 무너지면 아이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뭔지 모르겠지만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엄마 아빠의 싸움이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너무 자연스러운 사소한 갈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아빠 엄마가 싸울 때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너희들에게 소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일관적인 부모의 태도가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나와 남편이 싸워도 어린 시절 나처럼 눈치를 보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너무 감사하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의 싸움이 싫었던 것은 마치 세상이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곡기를 끊고 각자의 동굴로 들어가 버리셨다. 평소에 드시지도 않던 술병들이 집안엔 나뒹굴었다. 싸울 때마다 번번이  이번엔 마치 끝장을 볼 듯이 싸우셨다. 그러니 당연히 오빠와 나는 방치되었고 집안에서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때문에 부모님이 싸우시던 날이면 오빠와 나는 냉장고에  남은 김치, 마가린에 간장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런 시간들이 우리의 존재는 부모님에게 아무 의미가 없구나 라는 무력감과 불안함을 안겨줬다. 그것이 참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안다. 남편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그래서 싸울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내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가끔씩 남편과 냉전을 해도 남은 일상은 평범하게 보내려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저녁도 차려주고 아이들과 함께 먹으려고 한다. 그것이 어쩌면 아이들을 가장 안심시키는 방법이기도 하고 내 일상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이젠 싸워도 밥은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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