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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코에 쌀이 없다

by 원정미

나는 25년 전 산호제로 유학을 간 후 쭉 거기서만 살았다. 그러다 7월부터 캠핑카 여행을 시작했고 지금은 콜로라도 스프링에 와있다. 캘리포니아는 워낙에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사는 주로 유명했고 그 중에서도 산호제는 아시안들이 정말 많다. 백인의 인구수보다 아시안인의 비율이 훌쩍 넘어선 동네로 유명했다. 라틴계 인종과 비교해도 백인의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이 되었다. 물론 그 아시안인들이 모두 한국인은 아니다. 인도, 중국, 베트남쪽이 강세이긴 했지만 어쨌든 한국사람도 꽤 많은 곳이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23년 전 이사를 갈 당시만 해도 동네이웃들 중엔 백인들이 꽤나 있었다. 세월이 점점 흐르고 실리콘 밸리가 점점 뜨기 시작하면서 백인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 집을 팔고 떠났고, 그곳엔 인도 가족, 중국가족, 한국가족등 동양인으로 채워졌다. 우리가 올해 집을 팔려고 부동산에 내놓았을 때도 90%의 손님은 아시안계였고 중국계 미국가족이 우리 집을 샀다.


산호제 살면서 내 머릿속에 충격으로 남은 장면이 있다. 십여 년 전 어린 둘째와 막내를 데리고 이웃동네 좋은 놀이터에 놀러를 갔다. 그 동네가 워낙 학군이 좋고 놀이터나 도서관이 잘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아무 생각 없이 도착한 곳에서 남편과 나는 충격을 먹었다. 공원과 놀이터가 합쳐진 그 큰 공간이 100% 인도인들도 채워져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기 전까지. 한쪽에선 아이 생일파티를 하느라 20-30명의 인도가족과 아이들이 모여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청소년쯤으로 보이는 인도 친구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놀이터에서도 인도 엄마아빠와 함께 어린아이들이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고 있었다. 나는 순간 여기가 인도인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한국보다 더 학구열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곳이 인도이다. 자연스레 좋은 학군지를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동네는 거의 인도사람들이 주로 살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 동네 초등학교엔 검은 머리밖에 없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70% 인도사람 20% 중국사람 10% 한국사람이라며.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같이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아시안인이 살기엔 불편함이 없는 동네였다. 학교엘 가나, 병원엘 가나, 식당에 가나 유색인종들이 많았고 영어를 나보다 더 못하는 것 같은 의사, 교수를 만나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일상에선 더 심했다. 각자 자기 나라 특유의 억양으로 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서로가 영어를 하고 있음에도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웃긴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당연히 아시안계열의 식당이나 마트는 즐비했다. 엘레이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마트나 한국식당도 꽤 있었고 웬만한 미국마트에서도 음식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쌀은 한국인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국가에서도 많이 섭취하는 재료였기에 코스코나 큰 미국마트에선 항상 구비가 되어 있는 물품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우린 쌀이나 고기 같은 재료는 늘 코스코에서 사다 먹었다.


그러다 이번에 콜로라도 스프링에 도착해서 쌀이 똑 떨어진 것을 알았다. 남편과 나는 겸사겸사 구경도 할 겸 코스코에 시장을 보러 갔다. 한국 대기업용 작은 김치통도 보이고 메이드인 코리아라고 광고하는 한국화장품도 보이는데 쌀이 없었다. 나는 당황했다. "왜? 코스코에 쌀이 안 팔아?" 그랬더니 남편이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안 팔겠지."라며 당연한걸 왜 묻느냐는 식으로 답했다. 그리곤 주변을 돌아보니 다 백인이었다. 나중에 챗GPT에게 물어보니 콜로라도는 거의 65%가 백인이고 3% 정도만 동양인이라는 통계를 보여주었다.


그 후로 관광지엘 가던지 , 마트에 가던지,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러도 남편과 나만 동양인인걸 발견하곤 " 여기 우리 둘만 아시안이야-"라고 종종 속삭인다. 그리곤 " 그 많던 인도인과 중국인은 다 캘리포니아에만 사는 거야?" 라며 둘이 웃었다. 아직 그 누구도 우리에게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둥의 차별적인 언행을 들은 적은 없지만 뭔가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너무 튀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때문에 왠지 다들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고 뭔가 실수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캘리포니아에선 당당하게 썼던 코리안 아메리칸의 영어도 주눅이 들어서 영어 쓸 일이 생기면 자꾸만 남편에게 떠넘기게 되었다.


앞으로 여행을 마치고 우리가 어디로 정착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살고 싶은 도시가 이렇게 백인이 주류인 사회라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 직업 특성상 말을 많이 하고 듣기도 잘 들어야 하는 일인데 혹시' 네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라고 하면 어쩌지 벌써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미래의 정착할 곳의 조건이 하나가 더 붙었다. 적어도 코스코에 쌀은 파는 곳에서 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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