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매일 하는 그 '말'
1
작가를 때려치우겠다고 3개월 놀다가 다시 들어간 곳은 좋은 학교, 선생님, 학생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년 동안 40개 넘는 학교를 찾아다녔고 나는 지금도 어떤 지역이든 그때 갔던 학교로 기억한다.
동갑내기 피디 A와 팔도 유람(?)의 마지막 촬영지는 부산이었다. 방학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고3 학생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는데 내 질문이 끝나면 A가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친구는 꿈이 뭐야?"
카메라 자체가 낯설었을 아이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이야기해주었다. 그 얼굴들이 참 좋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A에게 물었다.
"애들한테 꿈은 왜 물어본 거야?"
"얼굴 보면 궁금하더라고. 얘가 나중에 뭐가 될지. 애들 하나하나가 우주 같지 않냐?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나 싶어서."
완전 술꾼에 노는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A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부디 지금도 어디선가 우주를 알아보는 피디로 일하고 있길.
2
얼마 전 엄마 생신이라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시간이 늦어서 자고 왔다. 내 방에는 못 보던 이불이 깔려 있었다.
"홈쇼핑에서 1+1 하길래 사서 하나 안방에 깔고 하나 거실에 깔려고 했는데 순이가 오줌 쌀 거 같더라고. 빨기도 힘들어서 여기 깔아놨는데 한 번 자봐."
의외로 잠자리에 예민한 남편은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 개운한 얼굴이 옆에 있었다.
"잘 잤어?"
"응. 이불이 너무 푹신푹신해서~ 구름 위에서 잔 것 같아."
어쩜 이렇게 예쁘게 말할 수 있나 싶어서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이거 이불 사주세요."
여보, 내가 빨리 이불 사서 맨날 구름 위에서 자게 해줄게.
3
좋은 말만 못 잊는 건 아니다. 남편과 나는 결혼하고 각자 살던 집의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서 6개월을 주말 부부로 지냈다. 한창 결혼 준비 중일 때 같이 일했던 B는 잊을 만하면 물었다.
"집은 어떻게 할 거야? 아직도 안 알아보고 있니? 어디 얻을 거야?"
"연말쯤 알아보려고요."
B는 이걸 묻고 묻고 또 물었다. 한 8번쯤 물었던 거 같다. 그리고 9번째 물었을 때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였는지 알게 됐다.
"집은 아직이니?"
"네, 연말쯤 알아보려고요."
"야, 어떻게든 같이 살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떨어져 살면 되니? 너 같은 애들이 얼마 못 살고 이혼하더라."
결혼도 안 했는데 이혼이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B는 요란하게 회사를 나갔고 당연히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다. 나중에 결혼식을 마치고 B가 회사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청첩장도 못 받았다며 있는 욕, 없는 욕을 했다고 들었다.
"얼마 못 살고 이혼할 거라면서 결혼식은 왜 오려고 했나 모르겠어요."
얘기를 전한 분도, 나도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말은 참 쉽다. 쉬운데 오래 남는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고 오늘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