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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Jan 17. 2022

아버님의 퇴임식

그리고 눈이 오던 길

 지난 연말 아버님의 퇴임식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자가격리 끝나고 첫 외출이었다. 사람 만나는 게 불안하고 휴가도 낼 수 없어서 남편만 갔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우리 집 순둥이가 유독 단호하게 말했다.

 "꼭 같이 갔으면 좋겠어, 꼭."

 "상황이 안 되면 못 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갈 수 있게 해서 같이 갔으면 좋겠어."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프리랜서 of 프리랜서인 나에게 퇴임식은 알 수 없는 문화라서 더 그랬다. 방송작가는 자주 회사를 옮기다 보니 퇴직이라는 개념이 없고 (당장 내일 회사를 그만두고 쭉 일을 안 하면 나는 방송작가를 퇴직한 것이다.) 아빠가 30년 넘게 근무 중인 회사도 가족들을 초대해서 퇴임식을 하지는 않는다. 왜 퇴임식에 가족이 가야 할까. 가기 전까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몇 달 만에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남편은 회사에 들렀다 와야 해서 혼자 기차를 탔는데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약간... 불안했다. 아빠가 미리 준비해 준 꽃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돌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역에서 남편을 만나 댁으로 아버님을 모시러 갔는데 작년 생신 때 사드린 코트를 꺼내고 계셨다.

 "나 오늘 이거 입으려고 하는데."

 "헤헤 얼른 입으세요, 아버님~ 이런 날 입으셔야죠~"


 처음 가보는 퇴임식장은 코로나 때문인지 생각보다 차분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정말 오랜만에 국민 의례를 했다. (학교 졸업하고 처음인 것 같다.) 식순에 퇴임하시는 분들을 인터뷰한 영상 시청이 있었는데 옆에 앉아 계시던 아버님 얼굴이 화면에 나와서 신기했다. 경쾌한 BGM이 흐르는 가운데(꽃길만 걷게 해줄게~ 이런 가사였다.) 퇴임에 대한 소회, 앞으로의 계획 등을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사 끝에 퇴임하시는 분들이 한 말씀씩 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노사연 님의 '만남'을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셨다. 외운 적이 없는데 내가 가사를 다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고 이 노래만큼 퇴임식에 잘 어울리는 노래가 또 있나 싶어서 두 번 놀랐다.


 마지막까지 함께 일하셨던 동료분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찍고 아버님의 퇴임식이 마무리됐다. 집에서 간단하고 신속하게 점심을 먹었는데 휴가를 못 낸 며느리는 결국 기차를 놓쳤고(...) 얼떨결에 아버님이 근처 터미널까지 데려다주셨다. 퇴임식 하는 동안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우리 며느리랑 이렇게 눈길을 달려보겠냐. 왔다 가느라 고생했다."

 퇴임이라는  시절의 끝에 닿아 있는 아버님의 새로운 출발에 며느리가 든든한 지원군... 까지는  되어도 조그만 응원단이 되어드릴  있다면. 눈이 하얗게 쏟아지던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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