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눈이 오던 길
지난 연말 아버님의 퇴임식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자가격리 끝나고 첫 외출이었다. 사람 만나는 게 불안하고 휴가도 낼 수 없어서 남편만 갔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우리 집 순둥이가 유독 단호하게 말했다.
"꼭 같이 갔으면 좋겠어, 꼭."
"상황이 안 되면 못 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갈 수 있게 해서 같이 갔으면 좋겠어."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프리랜서 of 프리랜서인 나에게 퇴임식은 알 수 없는 문화라서 더 그랬다. 방송작가는 자주 회사를 옮기다 보니 퇴직이라는 개념이 없고 (당장 내일 회사를 그만두고 쭉 일을 안 하면 나는 방송작가를 퇴직한 것이다.) 아빠가 30년 넘게 근무 중인 회사도 가족들을 초대해서 퇴임식을 하지는 않는다. 왜 퇴임식에 가족이 가야 할까. 가기 전까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몇 달 만에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남편은 회사에 들렀다 와야 해서 혼자 기차를 탔는데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약간... 불안했다. 아빠가 미리 준비해 준 꽃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돌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역에서 남편을 만나 댁으로 아버님을 모시러 갔는데 작년 생신 때 사드린 코트를 꺼내고 계셨다.
"나 오늘 이거 입으려고 하는데."
"헤헤 얼른 입으세요, 아버님~ 이런 날 입으셔야죠~"
처음 가보는 퇴임식장은 코로나 때문인지 생각보다 차분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정말 오랜만에 국민 의례를 했다. (학교 졸업하고 처음인 것 같다.) 식순에 퇴임하시는 분들을 인터뷰한 영상 시청이 있었는데 옆에 앉아 계시던 아버님 얼굴이 화면에 나와서 신기했다. 경쾌한 BGM이 흐르는 가운데(꽃길만 걷게 해줄게~ 이런 가사였다.) 퇴임에 대한 소회, 앞으로의 계획 등을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사 끝에 퇴임하시는 분들이 한 말씀씩 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노사연 님의 '만남'을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셨다. 외운 적이 없는데 내가 가사를 다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고 이 노래만큼 퇴임식에 잘 어울리는 노래가 또 있나 싶어서 두 번 놀랐다.
마지막까지 함께 일하셨던 동료분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찍고 아버님의 퇴임식이 마무리됐다. 집에서 간단하고 신속하게 점심을 먹었는데 휴가를 못 낸 며느리는 결국 기차를 놓쳤고(...) 얼떨결에 아버님이 근처 터미널까지 데려다주셨다. 퇴임식 하는 동안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우리 며느리랑 이렇게 눈길을 달려보겠냐. 왔다 가느라 고생했다."
퇴임이라는 한 시절의 끝에 닿아 있는 아버님의 새로운 출발에 며느리가 든든한 지원군... 까지는 못 되어도 조그만 응원단이 되어드릴 수 있다면. 눈이 하얗게 쏟아지던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