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Apr 20. 2022

남편이 바지 주머니에 휴지를 넣었을 때

그의 운명은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집안일은 거의 내 차지였다. 우리 집 살림 항목은 크게 요리, 청소, 빨래로 평일에는 남편이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고 청소는 주말에 몰아서 하기 때문에 남는 건 빨래 정도다. 빨래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었다. 


 며칠 전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빨랫감을 모으러 다녔다. 이사 오면서 생긴 남편의 방에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이제는 못 입을 것 같은 겨울 트레이닝 바지와 기모 맨투맨 티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살림을 잘 모르지만 세탁만큼은 흰옷, 검은 옷 나눠서 한다는 나름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날은 검은 옷 차례였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 밑에 가져갔는데 흰 뭉치 같은 것들이 조금씩 떨어졌다. 뭐지, 영수증이 있었나. 빨래를 하나씩 널고 문제의 겨울 트레이닝 바지 차례. 흰 뭉치가 우수수, 떨어지지 못한 작은 먼지들이 허옇게 붙어 있었다. 몇 가닥 되지 않는 인내심이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큰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돌돌이를 바지에 문질렀다. 한 장, 두 장, 세 장 뜯어내고 굴려봐도 젖은 빨래라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서 남편에게 보냈다. 우리는 평소 문자를 보낼 때만큼은 존댓말을 쓰는데 다섯 글자에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이게 뭐냐고.


 잠시 후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당연히, 당연히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은 이렇게 물었다.

 "그 바지가 어디 있었는데?"

 "니 방바닥에."

 "빨려고 내놓은 것도 아닌데 그걸 왜 빨았어?" 

 "어차피 이제 더워서 못 입는 거 아니야? 그거 나 격리하는 내내 바닥에 있었다고."

 "그렇긴 한데 빨 거였으면 내가 빨래 바구니에 넣어놨겠지."

 "... 아, 그래? 그럼 쓸데없이 빤 내가 잘못한 거네? 그럼 앞으로 니 빨래 니가 빨아."

 날 선 말을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돌돌이도, 허연 먼지도 팽개치고 일하러 방에 들어가 버렸다. 몇 시간 뒤 퇴근한 남편이 조용히 그 잔해를 치우면서 니빨(래)니(가)빨(아) 사건은 일단락됐다.


 재택근무가 끝나고 다시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남편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어제저녁 이틀 만에 만난 남편과 야식을 먹으며 밀린 토크를 했다. 남편은 잘못한 후배를 혼내야 할 일이 생겨서 난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한 시간 정도 생각을 했지.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말해야 기분이 덜 나쁠까. 근데 갑자기 바지 주머니에 휴지 넣었던 게 생각나더라."

 "에? 갑자기?"

 "내가 문자 받고 바로 전화했잖아. 근데 그러지 말 걸 싶더라고. 좀 생각하고 말할걸. 그리고 그때는 미안하다고 하기 싫었어."

 "왜?"

 "네가 너무 화가 나 있기도 했고... 미안해하길 바라는 거 같아서? 괜히 그랬어."

 센 척하느라(?) 남편한테 말은 안 했지만 나야말로 그래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좀 바꿔볼게.



 

+ 어제저녁의 대화

 "나 시험 끝나면 브런치 진짜 열심히 쓰려고 했는데 이게 한번 손을 놓으니까 잘 안되더라고. 짧게 써도 야마(고운 말을 씁시다)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 잡겠는 거야. 근데 이거 써야겠어. 사진도 있고. 제목은 남편이 바지 주머니에 휴지를 넣었을 때." 

 "이 얘기의 야마가 뭔데?"

 "남편은 재수땡이."

 "???????"

 "억울하면 너도 브런치 해."

 보고 있나 남편? 사랑해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님의 퇴임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