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운명은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집안일은 거의 내 차지였다. 우리 집 살림 항목은 크게 요리, 청소, 빨래로 평일에는 남편이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고 청소는 주말에 몰아서 하기 때문에 남는 건 빨래 정도다. 빨래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었다.
며칠 전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빨랫감을 모으러 다녔다. 이사 오면서 생긴 남편의 방에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이제는 못 입을 것 같은 겨울 트레이닝 바지와 기모 맨투맨 티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살림을 잘 모르지만 세탁만큼은 흰옷, 검은 옷 나눠서 한다는 나름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날은 검은 옷 차례였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대 밑에 가져갔는데 흰 뭉치 같은 것들이 조금씩 떨어졌다. 뭐지, 영수증이 있었나. 빨래를 하나씩 널고 문제의 겨울 트레이닝 바지 차례. 흰 뭉치가 우수수, 떨어지지 못한 작은 먼지들이 허옇게 붙어 있었다. 몇 가닥 되지 않는 인내심이 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큰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돌돌이를 바지에 문질렀다. 한 장, 두 장, 세 장 뜯어내고 굴려봐도 젖은 빨래라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서 남편에게 보냈다. 우리는 평소 문자를 보낼 때만큼은 존댓말을 쓰는데 다섯 글자에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이게 뭐냐고.
잠시 후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당연히, 당연히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은 이렇게 물었다.
"그 바지가 어디 있었는데?"
"니 방바닥에."
"빨려고 내놓은 것도 아닌데 그걸 왜 빨았어?"
"어차피 이제 더워서 못 입는 거 아니야? 그거 나 격리하는 내내 바닥에 있었다고."
"그렇긴 한데 빨 거였으면 내가 빨래 바구니에 넣어놨겠지."
"... 아, 그래? 그럼 쓸데없이 빤 내가 잘못한 거네? 그럼 앞으로 니 빨래 니가 빨아."
날 선 말을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돌돌이도, 허연 먼지도 팽개치고 일하러 방에 들어가 버렸다. 몇 시간 뒤 퇴근한 남편이 조용히 그 잔해를 치우면서 니빨(래)니(가)빨(아) 사건은 일단락됐다.
재택근무가 끝나고 다시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남편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어제저녁 이틀 만에 만난 남편과 야식을 먹으며 밀린 토크를 했다. 남편은 잘못한 후배를 혼내야 할 일이 생겨서 난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한 시간 정도 생각을 했지.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말해야 기분이 덜 나쁠까. 근데 갑자기 바지 주머니에 휴지 넣었던 게 생각나더라."
"에? 갑자기?"
"내가 문자 받고 바로 전화했잖아. 근데 그러지 말 걸 싶더라고. 좀 생각하고 말할걸. 그리고 그때는 미안하다고 하기 싫었어."
"왜?"
"네가 너무 화가 나 있기도 했고... 미안해하길 바라는 거 같아서? 괜히 그랬어."
센 척하느라(?) 남편한테 말은 안 했지만 나야말로 그래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좀 바꿔볼게.
+ 어제저녁의 대화
"나 시험 끝나면 브런치 진짜 열심히 쓰려고 했는데 이게 한번 손을 놓으니까 잘 안되더라고. 짧게 써도 야마(고운 말을 씁시다)가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 잡겠는 거야. 근데 이거 써야겠어. 사진도 있고. 제목은 남편이 바지 주머니에 휴지를 넣었을 때."
"이 얘기의 야마가 뭔데?"
"남편은 재수땡이."
"???????"
"억울하면 너도 브런치 해."
보고 있나 남편?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