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오는
육식 왕 남편이 메뉴가 고기인 회식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꼬기에 대한 남편의 깊은 사랑을 아는 나로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기만 먹고 일찍 오면 되잖아. 갔다 오지."
"아냐, 별로 안 가고 싶어."
"왜?"
기복이 없는 남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회사 재미없어."
작년에 이직한 남편은 아직도 사람들이 좀 불편하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전에는 피곤하면 사무실에서 잠깐씩 눈을 붙인다고 했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는다고. 딱히 싫거나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지만 편하지 않다고 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일하다 보면 이걸 왜 하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들어. 자괴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렇구나."
서로 전혀 다른 직종에서 일하고 있지만 5년 차인 남편에게 13년 차의 지혜를 나눠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편도 8년 뒤에는 알게 되겠지. 그런 건 죽었다 깨어나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나 5년 차에 어디 있었지? KBS? EBS?"
방송 작가는 과거를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1년에 한 번씩 회사를 옮겼는데 나에게 2012년은 KBS, 2014년은 EBS 이런 식이다.
"원래 1, 3, 5년 차에 슬럼프가 온다고 하잖아. 나도 그런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 5년 차에 OOO 있었을 땐 괜찮았던 거 같아. 오히려 8년 차에 OOO에서 일할 때 맛이 갔지."
"그랬지."
"일에서 너무 큰 의미를 찾으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던 거 같아. 근데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더라고. 나는 일을 진짜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보람, 재미 같은 걸 포기하는 게 어렵지."
일은 힘들다. 약간 재미있냐, 드럽게 재미없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일의 기본값은 힘듦이다. 그런데 10년이 훌쩍 지나니 일의 고통은 거의 다 까먹었다. 다만 사람만 기억에 남는다. 나를 맛이 가게 했던 사람. 오늘까지 작가일 수 있게 힘을 준 사람. 단 한 명이라도 기댈 곳이 있다면 우리는 일터에서 꽤 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나는 그랬다.
13년 차는 현실적이면서도 시시한 조언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제 회사에 기대하는 게 없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도. 그냥 내 할 일 잘하고 하루하루 무사히 넘기고, 회사가 제때 월급 주면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 물론 작은 즐거움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나는 회사 밖에도 재밌는 게 많은 사람이니까. 여보랑 이렇게 저녁에 만나서 먹고 떠드는 것도 재밌고. 아주 조금이라도 내려놔 봐. 그래도 괜찮아."
위기를 벗어나 당신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