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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Nov 03. 2022

남편의 사생활

한밤중 응급실 체험기

 나보다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남편은 이런저런 군것질을 하면서 나를 기다린다. 인체에 무해하면 고무도 씹어 먹을 나와 달리 맛에 대한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있어 '이게 군것질이라고?' 싶은 것들을 종종 먹기도 한다.   


 문제의 음식을 먹은 그날은 남편이 말을 안 해서 몰랐다. 다음날 회사에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 없어? 나 계속 설사하고 열나는 것 같아."

 전날 저녁, 같이 갈치를 구워 먹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편 회사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 있고 병원도 하나밖에 없는데 조퇴하고 갔더니 장염 같다는, 그런데 열이 나는 걸 보니 간염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진단을 받았다.     


 회사 숙소에서 쉬겠다는 남편을 설득해서 집에 오게 했다. 1시간 가까운 거리를 오다 서다 하면서 간신히 왔다고 한다. 퇴근하고 집에 가니 그때까지 열이 펄펄 끓었다. 조금 더 지켜볼까 하다가 시간만 버릴 것 같아서 부모님께 연락해 응급실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시간이 9시쯤이었나. 


 집을 나서려는데 남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어제 너 오기 전에 육회 먹었는데... 미안해."

  "... 뭐가 미안해. 괜찮아. 얼른 가자."

 대학 병원 응급실은 처음이었다. 보호자 한 명만 같이 들어갈 수 있다며 체온을 쟀는데 나도 37.4도로 열이 난다고 했다.

 "저 코로나 아닌데요?"

 다른 증상이 없어도 안 된다고 해서 나 대신 엄마가 남편의 보호자가 되었다. 코로나 검사 후 수액 맞기 시작하는 걸 보고 엄마가 나왔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다. 두 분은 집에 가시라고 하고 혼자 응급실 앞에 앉아 있는데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오래 걸린대. 집에 가 있어. 알아서 하고 갈게."
 "됐거든.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겉옷을 벗고 한참 있다가 다시 열을 쟀고 좀 떨어져 있었다. 응급실 직원분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니 머리맡에 주렁주렁 수액을 달고 자고 있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눈을 뜬 남편이 힘없이 웃었다.

 "좀 어때?"

 "아직. 집에 가 있으라니까."

 "가긴 어딜 가."

 똑똑 떨어지는 수액 방울을 보고 있는데 침대 커튼 너머에서 성난 할아버지와 나지막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불 꺼. 불 끄라고, 시팔 것."

 "여가 집이여?"

 "죽을려. 죽는 게 낫겄어."

 "그려, 죽어."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자꾸 웃음이 났다. 할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응급실 불은 꺼지지 않았고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낮춰 흐흐 웃었다. 부디 지금은 쾌차하셨길.     

 

 CT까지 찍은 결과 남편은 무언가에 감염된, 그래서 열이 나는 장염이라고 했다. 며칠 약 먹고 잘 쉰 덕에 지금은 깨끗이 나았고 군것질 활동도 다시 시작했다. 다만 나는 '나 몰래 또 이상한 걸 먹었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습관이 생겼다. 어제도 마중 나온 남편을 만나자마자 물었다.

 "뭐 먹었어? 뭐 먹었을 텐데?"

 "사생활은 물어보지 말아 줄래?"

 "내가 너의 사생활 아니니?"

 "오... 말 되게 잘하네."

 "생명의 은인한테 사생활을 묻지 말라니?"

 계란 물 묻힌 소시지를 구워서 정말 오랜만에 같이 맥주를 마셨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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