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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Dec 31. 2022

망한 크리스마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올해 크리스마스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실로 엄청났다. 얼마나 엄청났냐면 10월 중순부터 밤마다 캐럴을 들었다. 

 "벌써... 이런다고?"

 머리맡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남편은 영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작년 연말 코로나에 걸렸던 남편과 나는 열흘의 격리가 끝나자마자 이사 지옥에 빠졌다. 은행 대출과 입주 관련 각종 공사를 알아보러 다니다가 연말·연초를 보내버렸다. 그래서 뭐랄까. 올해는 배로 뽕을 뽑아야 한다는 비장한 마음을 가지게 것이다. 


 기분을 내기 위해 다양한 아이템을 모았는데 그중 하나가 어드벤트 캘린더라는 것이다. 숫자가 1부터 24까지 쓰여 있는 상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뭔지 올해 처음 알았다. 한 칸에 한 개씩, 총 24개의 작은 선물(초콜릿이나 장난감 같은)이 들어 있고 12월 1일부터 하루에 하나씩 여는 시스템이다. 다 열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최적화된 아이템 아니겠습니까. 

 "나 이거 열 때마다 박수 좀 쳐줘."

 남편은 12월 내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도 다 못 뜬 얼굴로 박수치며 캘린더 개봉식을 축하해줬다.  


 크리스마스 이브이브였던 23일, 올해는 우리 친구 니니를 집에 초대해서 함께 보냈다. 술꾼 셋이 모였으니 약간의 불안감이 있긴 했다. 

 "정신 차렸는데 25일이면 어떡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말이 씨가 됐다. 


 니니는 24일 점심쯤 근 5년 만에 최악의 숙취를 호소하며 물만 한 잔 먹고 집에 갔다. 괜찮은 척하던 남편은 오후 5시가 넘도록 몸져누워 있었다. 그들에 비해 비교적 상태가 멀쩡했던 나는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혼자 보냈어도 이거보다는 나았겠는데...'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숙취맨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보낼 줄이야. 나의 분노는 무려 20일 전에 예약해 둔 케이크를 혼자 찾으러 가며 정점에 달했다. 개떡 같은 크리스마스, 망해라 크리스마스. 


 내가 얼마나 목 빠지게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는지 아는 남편이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저녁 뭐 먹을까? 마트에 눈뽀로로 만드는 집게 사러 갈까?"

 "안 가. 어차피 망했는데."

 "아니야, 지금부터 최선을 다하면 돼~ 가자, 가자~"

 크리스마스이브가 5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늦었을 때라는 말이 있지만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최선을 다하니 망한 크리스마스를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뭐 그렇게 대단한 걸 한 건 아니고 떡볶이 해 먹고 놀이터 가서 눈으로 오리와 뽀로로를 만든 게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잠들기 전 남편이 말했다.

 "내일이 진짜 크리스마스니까 재미있게 놀자."

 "구래."


 보통 브런치에는 남편의 좋은 얘기, 귀여운 모습만 기록했는데 굳이 2022년의 마지막 날 이걸 쓰는 이유가 있다.


남편의 크리스마스 카드

 

 오늘 트리와 함께 망했지만 마냥 망하지는 않은 크리스마스를 정리했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금주하자.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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