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도전
엄마, 아빠는 1월 2일에 결혼했다. 옛날에는 신정 다음 날인 1월 2일도 공휴일이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이런 말을 했다.
"엄마랑 아빠가 결혼한 날이라 국가 기념일로 지정한 거야~"
지금은 1월 2일이 빨간 날이 아닌데 아버지,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국가의 배신인가요.
지난 연말 우리 집은 아빠의 정년퇴직 이슈가 휩쓸고 지나갔다. 해가 바뀌고 제37회 기념일을 맞아 두 분은 남해로 여행을 떠나셨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남들 다 회사 가는데 나만 집에 있으면 우울할 거 같으니까 좋은 데 가서 놀다 와야지."
여행 전날, 엄마한테 사진 많이 찍고 재밌게 놀다 오라고 얘기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일 뭐 입고 갈 거야?
-글쎄?
-커플티 없어? 후드티 같은 건 어때?
-영웅이 후드티 사놓은 거 있는데.
-파란색?
-파란색도 있고 흰색, 검은색도 있어.
-종류별로... 다 샀어?
-ㅎㅎㅎㅎㅎ
떠나는 날 아침 두 분의 인증샷을 보고 흐흐 웃었다. 엄마가 옷을 크게 입는 편이라 아빠한테도 후드티가 잘 맞았다. 간만에 쓸모 있는 아이디어를 낸 것 같아서 뿌듯했다.
어제는 서울에서 아빠 친구 딸의 결혼식이 있었다. 부모님과 맛있는 것도 먹고 호텔에서 하루 자고 바로 출근하려고 저녁에 서울에 올라왔다. 지하철역에서 엄마를 만났는데.
"아빠는?"
"저 뒤에 오네. 아빠 후드티 입었다?"
"에???"
아빠 등 뒤로 모자가 조금 보였다.
"진짜네? 엄청나네?"
"마트에서 산 거야~ 원 플러스 원~"
"이제 후드티만 입는대."
정년퇴직 후 상실감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동생과 번갈아 가며 문지방이 닳도록 본가에 들락거리고 있다. 얼마 전 아빠랑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아빠는 지금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빠르게 늙거나 오히려 젊어질 수 있는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아."
"젊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재미있게 살아야지. 새로운 것도 배우고 안 해본 것도 해보면서 아빠가 좋아하는 걸 찾아봐. 뭐든 할 수 있어."
오늘은 셋이 백화점에 가서 아빠 맨투맨 티를 샀다. 아무래도 아빠가 젊어지는 방향을 선택한 것 같아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