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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Feb 06. 2020

(처음이자) 마지막 탈출기

다단계 다녀왔 습니다 下

 -잘 부탁드립니다

 본격적인 교육은 내일부터라며 오늘은 숙소에 가서 쉬라고 했다. 너덧 명과 사무실을 나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마트로 들어갔다.

 "초롱 씨, 처음 온 기념으로 한 턱 내야죠."

 같이 지낼 분들께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에서 라면을 사오라고 했다. 다섯 개 묶음을 사서 한 손에 들고 주택가를 한참 걸었다. 도착한 곳은 어느 건물 반지하였다.     


 사무실에서 봤던 정장 입은 사람들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앉아있거나 누워있었다. 옷과 함께 얼굴도 조금씩 바뀐 것 같았다. 활기 넘쳤던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녁 먹어요. 얼른 오세요."

 밥 한 공기와 김칫국, 김치 그리고 콩자반이 전부였다. 이 정도 살림이면 내가 사 온 라면 한 묶음이 인사치레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절반도 못 먹고 수저를 내려놨다.     


 -큰 목소리의 쓸모

 현관 옆에 있던 화장실로 가다가 주저앉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깜짝 놀란 H와 낮에 화장실까지 따라왔던 여자가 다가와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대답을 못 하자 잠깐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진정하고 얘기를 해봐요. 왜 그래요, 초롱 씨?"

 "집에 흐끅흐ㅡ흑 보내주세요 흑흫ㅇ흐"

 숙소 근처에 있던 놀이터에 앉아서 우렁차게 울었다.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골이 울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결국 H와 여자는 설득을 포기하고 나를 대장쯤 되는 사람에게 데려갔다.

 "똑바로 앉아요."

 무서워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잔뜩 움츠리고 있던 나에게 여자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면 절대 아무한테도 여기 왔다 간 거 말하면 안 돼. 알겠어요? 약속할 수 있어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노려보더니 조용히 나가라고 했다. 서둘러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는데 H가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따라왔다.

 "괜찮아?"

 "아니."

 "어디로 갈 거야?"

 "모르겠어."

 마지막 대화였다. 나는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      


 -그날의 한강

 집에 내려갈 수도 서울에 잘만한 곳도 없었다. 노선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1호선 지하철역이 닿는 곳에 내리기로 했다. 창밖으로 한강을 바라보는데 다시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10년도 훌쩍 지난 그 날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타고난 길치인 나는 어떻게 인천까지 찾아갔고 연락을 받은 슈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후에 친구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렇게 하얗게 질린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만신창이가 되어 잠들었다. 다음 날, 더듬더듬 전날의 기억을 털어놓자 슈니가 검색을 해보더니 말했다.

 "초롱, 거기 다단계래."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후 나는 한강만 보면 그날의 악몽이 떠오르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1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끝내 마음을 붙이지 못한 건 그 때문일까. 내가 한강이라도 좀 억울하긴 하겠다. 아무튼,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데 그 예외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사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yoonkijeong/2829852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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