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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Jun 22. 2020

혹시 일이 아닌 사람을 견디고 있다면

우선순위는 행복

 -언니, 저 이제 작가 안 하려고요. 회사 그만뒀어요.

 코로나 끝나면 보자고 만남을 차일피일 미뤘던 후배 J에게 짧지만 단호한 메시지가 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할 수 없어서 한참을 망설이다 답을 했다.

 -잘했어. 다음 주에 밥 먹을까?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만난 게 작년 연말이었다. 이후 J는 서너 번 회사를 옮기면서 가끔 소식을 전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2월에는 고향 대구에 내려와 있다며 집밖에는 거의 나갈 수 없지만 부모님과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잘 지내고 있다고 씩씩하게 웃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J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더는 못하겠어요. 하고 싶지도 않고요. 연달아 이상한 사람들 만나서 시달리다 보니까 저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친구들한테 변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망가지면서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아요, 언니. 그게 맞는 거잖아요."

     

 J와 나는 지옥 같았던 시절을 함께 겪은 전우다. 우리는 '다음 주에 꼭 그만두자'는 말을 되풀이하며 끔찍한 인간1의 폭언과 협박을 참아냈다. 겨우 벗어났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끔찍한 인간2가 나타났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은 더 빨리 만들어졌어야 했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J가 먼저 팀을 떠났다.

 "저는 다시 돌아가면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때의 제가 진짜 기특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언니가 있어서 버텼어요."

 "나도 그래. 너밖에 없었어."

     

 왜 우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견뎌야 할까.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을 지켰던 의문의 답을 알 수는 없지만 벗어나는 방법이랄까. 뭐 그런 건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을 건넸다.

 "내가 네 나이 즈음 봤는데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나. 근데 읽는 내내 행복했던 것 같아. 밤에 잠 안 올 때 한 번 읽어봐."

 책을 받아든 J가 활짝 웃었다.

     

 우연히 끔찍한 인간 중 한 명의 근황을 전해 들었다.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저랑 같이 일했던 동생은 작가 때려치웠어요. 그 사람보다 훨씬 똑똑하고 착한 친군데 이제 이 일 안 하겠대요. 뭔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사정을 잘 아는 동료가 먼 곳을 보다가 말했다.

 "주로 그런 사람이 살아남는 것 같아요, 이 바닥에."

 "그렇게 사느니 오늘 그만둘래요."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맥없이 웃었다.


 J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궁금한 게 많았고 작은 일이라도 열심이었다. 나이만 먹었지 어리숙한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동그란 안경 뒤로 빛나던 두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언니, 제가 열심히 할게요. 많이 가르쳐 주세요."

 <청춘의 문장들> 속에 끄적여놓은 메모를 읽었을지 모르겠다.

 -J야, 언제 어디서든 반짝반짝 빛날 수 있길 언니가 응원할게. 우리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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