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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Jul 30. 2020

술꾼의 희노애락

건강하게! 오래오래!

 "그럼 술 많이 드시겠네요."

 방송국에서 일한다고 하면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대체 방송국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길래 저런 반응이 나오나 싶다가도 조금 일조한 게 있으니 아니라고는 못 하고 우물쭈물한다. 만약 다른 직업을 가졌으면 술과 거리를 두고 살았을까.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엄마에게 "우리 딸은 사춘기가 없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나의 학창 시절은 대단히 잔잔했다. 다만 엄마가 모르는 과거가 있는데 교실에서 존재감이 희미했던 청소년 초롱은 단체로 1박 하는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노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서 술을 먹었다. (엄마 미안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희한하다. 자칭 잘나가는 친구들은 용케도 술을 구해서 야영, 수학여행에 들고 왔고 밤이 깊으면 가방에서 한 병, 두 병씩 꺼내놓았다. 십시일반으로 양이 꽤 늘면 같이 먹을 게스트가 필요했는데 희멀건 나는 그들의 구세주였다. 홀짝홀짝 같이 술을 나눠 먹었어도 우리의 우정은 일회성이었고 밤이 지나면 언제 짠을 했냐는 듯 데면데면해졌다. 어쨌든 나는 내가 본투비 술꾼이라는 걸 제법 일찍 깨달았다.     


 감기에 옴팡 걸려 수능을 폭삭 망친 날, 아빠와 감자탕에 소주를 마시며 나의 본격 음주 생활이 시작됐다. 대학교 다닐 때는 술 먹고 노는 게 재밌었고 취업한 이후에는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술로 풀었다. 20대를 술과 함께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때는 몰랐다. 30대 시작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게 될 거라는 걸.     

 술을 좋아하고 잘 먹는 건 둘째 치고 나는 숙취가 없었다. 전날 아무리 과음을 해도 숙면을 취하고 일어났는데 어느 순간부터 술을 마시면 잠을 못 자게 됐다. 잠든 지 서너 시간도 안 돼서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면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꾼의 미덕은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것인데 나는 1단계부터 망했다.     

 

 '흥청망청'을 몸소 실천했던 나와 동무들은 여러 차례 숙취에 얻어맞고 결국 건배사를 바꿨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술 먹자~"

 허약한 30대 술꾼은 무작정 달리지 않는다. 술보다 비싼 숙취 해소 음료를 챙기고 그날의 컨디션을 고려해 마실 양을 정한다. (물론 정한다고 꼭 지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종종 얘기한다. 할머니가 되면 낮에 만나서 막걸리를 마시자고. 그러려면 아프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이 무색한 우리의 기록.jpg


 어제 퇴근하고 엄마 집에 가는 길에 비가 조금씩 내렸다. 나는 두부 한 모와 막걸리 한 병을 샀다. 아빠와 마주 앉았을 때는 창밖으로 번개가 번쩍였다.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자연인>을 보면서 양은 사발을 부딪쳤다.

 "크, 좋네."

 예전 같았으면 겨우 한 병을 누구 코에 붙이냐며 아빠도 나도 투덜거렸을 텐데 어제는 사이좋게 나눠 먹고 점잖게 해산했다. 잘 자고 일어나니 비가 그쳐 있었다.


사진 제공

내 사랑 니니 of Delicious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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