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할 편지
지난주에 의좋은 (술꾼) 남매가 모여 한잔했어요. 그날따라 우리의 화두는 아빠의 퇴직이었는데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왔구나, 여러 번 놀랐어요. 아빠는 언제까지나 아침 일찍 단정한 회사복 입고 출근할 줄 알았는데 이제 그런 날이 2년밖에 안 남았다니. 시간이, 세월이 참 빨라요. 그렇죠.
전날 아무리 과음을 해도 "가기 싫다"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회사에 가는 사람이라고, 그 성실함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엄마가 아빠를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 아빠가 40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나오면 어떨까, 감히 짐작할 수 없어요. 다만, 나는 프리랜서니까 아빠보다 퇴직 경력이 많잖아요? 작가 되고 나서 3개월씩 두 번, 총 6개월을 놀았는데 사실 좋은 기억은 없어요. 그때는 일을 못 하니 주눅도 들고 스스로 괴롭혔던 것 같아요. 엄마, 아빠한테 손 벌리기 싫어서 하루에 한 끼 먹고 6평 원룸에 종일 누워 있고 그랬어요. 별 도움 안 되는 경험담 같은데 그때 그랬던 걸 후회해요. 다시 그런 시간이 온다면 나한테 친절하고 싶어요.
요즘 <임계장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글쓴이는 버스 회사 배차장이었다가 아파트 경비원이었고 고층 건물 주차 관리원, 터미널 보안 요원으로 직업을 바꾸며 일터를 옮기는데 어딜 가도 임시 계약직 노인장, 임계장을 벗어나지 못해요. 여러 번 책을 읽다가 덮고 또 읽다가 덮었어요. 세상에는 왜 이렇게 못된 사람이 많을까 인류애가 식어버리고 일하는 사람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는 이런 나라에서 취업률, 그깟 숫자가 올라봐야 무슨 소용인가 화가 나고.
아빠가 보기에는 여전히 애 같겠지만 스스로 문득 나이 들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나는 어리고 아빠는 젊었을 때는 아빠 또래의 남자를 봐도 아빠를 떠올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중년인 남자를 보면 아빠가 생각나요. 아빠도 혼자 있을 때 저렇게 피곤한 얼굴을 할까, 아빠는 사람들이랑 어울릴 때 어떤 얘기를 할까. 그리고 책을 보면서 궁금했어요. 아빠도 퇴직을 생각하면 막막할까. 걱정될까. 그럼 난 뭘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아빠 생일에 아빠가 아빠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며 좋은 옷 한 벌 샀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참 좋았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오래 한 회사에 다닌 것 자체가 기적일지도 몰라요. 견디고 버티기 위한 노력은 이미 차고 넘치게 했으니 회사를 졸업하면 부디 아빠를 위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요. 이제 나도 막연한 걱정은 접어두고 아빠랑 뭘 하면 재미있을까 고민할게요. 일단, 이번 주 금요일에 집 앞에서 만나요. 1차는 살얼음 맥주, 2차는 사위가 양주를 준비했대요. 화목한 불금을 보내보아요.